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개요
<img src="https://d2xsxph8kpxj0f.cloudfront.net/310519663429662740/ffcjRzrXsTCDKgX6s8aDwC/articles/1784103013627-cbf9d1ebbeb4b7db.webp" alt="Walter Gropius" data-orientation="original" data-original-src="https://d2xsxph8kpxj0f.cloudfront.net/310519663429662740/ffcjRzrXsTCDKgX6s8aDwC/articles/1784103015652-48b08491eb61b533.webp" width="600" />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년 5월 18일~1969년 7월 5일)는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다. 1919년 바이마르에 바우하우스를 창립해 1928년까지 초대 교장을 맡았고, 예술과 공예, 건축, 산업 생산을 하나의 교육 체계로 묶었다. 르 코르뷔지에,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와 함께 국제주의 양식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힌다.
그로피우스가 가장 크게 바꾼 것은 건물의 외형보다 디자인을 배우고 만드는 방식이었다. 학생이 재료와 색, 형태의 기초를 익힌 뒤 공방에서 실제 제작에 참여하고, 마지막에는 건축과 제품을 하나의 환경으로 결합하도록 교육 과정을 구성했다. 디자이너를 혼자 형태를 결정하는 예술가보다 기술자와 제작자, 기업을 연결하는 협업자로 키우려 했다.
건축에서는 아돌프 마이어와 함께 설계한 파구스 공장을 시작으로 유리와 벽돌, 철, 콘크리트를 가볍게 조합했다. 바우하우스 데사우에서는 학교와 공방, 기숙사, 행정실을 기능별로 나누고 다리와 복도로 연결했다.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는 하버드대학교의 건축 교육을 바꾸고 디 아키텍츠 콜래버러티브를 세워 집단 설계를 실무 조직으로 발전시켰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를 하나의 외관 양식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시대에 맞는 재료와 생산 방식, 사회적 요구를 분석하고 그에 맞는 형태를 찾는 방법을 가르치려 했다. 그러나 흰색 벽과 평지붕, 유리 파사드 같은 결과물이 세계적으로 반복되면서 바우하우스는 오히려 하나의 스타일처럼 받아들여졌다.
약력·연혁
건축가 집안과 베렌스 사무소
발터 그로피우스는 1883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종조부 마르틴 그로피우스는 현재 그로피우스 바우로 불리는 베를린 장식미술관을 공동 설계한 건축가였다. 발터 그로피우스의 아버지도 건축 행정 분야에서 일했다.
그로피우스는 1903년부터 뮌헨과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의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지만 학위를 마치지 않았다. 1908년 페터 베렌스 사무소에 들어가 1910년까지 일했다. 베렌스는 당시 AEG의 공장과 제품, 그래픽, 광고를 함께 설계하고 있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도 같은 사무소에서 근무했고, 훗날 르 코르뷔지에라는 이름을 쓰게 되는 샤를에두아르 잔레그리도 뒤이어 짧게 일했다. 세 사람은 활동 시기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산업 생산과 기업 디자인을 가까이에서 경험한 공통점을 가졌다.
파구스 공장과 독립 사무소
그로피우스는 1910년 아돌프 마이어와 독립 사무소를 열었다. 두 사람은 건축뿐 아니라 가구와 벽지, 자동차 차체, 철도 차량을 비롯한 산업제품을 설계했다.
1911년에는 알펠트의 파구스 공장 작업을 맡았다. 공장의 기본 배치와 초기 계획은 에두아르트 베르너가 마련한 상태였고, 그로피우스와 마이어는 외관과 주요 건물, 이후의 증축과 실내를 다시 설계했다. 두꺼운 벽과 작은 창을 사용하던 공장 건축에서 벗어나 넓은 유리면과 가벼운 모서리를 앞세웠다.
1914년 쾰른 독일공작연맹 전시회에서는 모범 공장과 사무실 건물을 선보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독일군에 입대해 서부전선에서 복무했고, 전쟁이 끝난 뒤 베를린의 예술노동평의회와 노벰버그루페에 참여했다.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1919년 그로피우스는 바이마르의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통합해 국립 바우하우스를 창립하고 초대 교장이 됐다. 창립 선언문에서는 건축을 회화와 조각, 공예가 함께 모이는 최종 목표로 제시했다. 표지에는 리오넬 파이닝거가 새긴 대성당 목판화를 사용했다.
초기 바우하우스는 중세 공방의 도제 교육을 참고했다. 공방마다 형태를 가르치는 예술가와 제작 기술을 가르치는 장인이 학생을 함께 지도했다. 파울 클레와 바실리 칸딘스키, 요하네스 이텐, 오스카 슐레머, 게르하르트 마르크스 같은 예술가가 교사로 합류했다.
1923년 그로피우스는 학교의 방향을 ‘예술과 기술, 새로운 통합’으로 정리했다. 수공예 실험을 산업 생산과 연결하고, 공방에서 만든 시제품을 기업과 협력해 양산제품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데사우 이전과 교장 사임
튀링겐주의 보수 정치 세력이 예산을 삭감하자 바우하우스는 1925년 바이마르를 떠났다. 산업도시 데사우가 학교를 받아들였고, 그로피우스는 새 교사와 마이스터 주택, 학생 기숙사, 주거단지를 설계했다.
바우하우스 데사우는 1926년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학교는 제품을 개발하고 기업과 생산 계약을 맺는 설계 조직에 가까워졌다. 건축 교육은 1927년에야 독립 부서로 본격화됐고, 하네스 마이어가 초대 책임자로 합류했다.
그로피우스는 학교 운영과 외부 수주, 정치권 대응을 함께 맡았다. 1928년 4월 교장직에서 물러나 하네스 마이어에게 자리를 넘겼다. 이후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세 번째 교장을 맡도록 추천하는 데도 관여했다.
공동주택과 독일에서의 마지막 작업
교장직을 떠난 뒤 그로피우스는 베를린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며 공동주택과 도시계획, 전시 설계에 집중했다. 카를스루에 담머슈토크 주거단지와 베를린 지멘스슈타트 주거단지에 참여해 반복되는 주거동과 녹지, 일조를 연결했다.
그는 주택을 공장에서 생산한 부품으로 빠르게 조립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건축 현장을 하나의 생산 공정처럼 조직하고, 같은 부품을 조합해 여러 평면을 만드는 체계를 제안했다.
1933년 나치 정권이 집권한 뒤 독일에서 작업을 이어가기 어려워졌다. 1934년 이세 그로피우스와 영국으로 이주해 맥스웰 프라이와 협업했다. 임핑턴 빌리지 칼리지를 비롯한 학교와 주택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영국에 유럽 근대건축을 소개했다.
하버드와 미국 정착
1937년 그로피우스는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디자인스쿨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옮겼다. 이듬해부터 건축학과를 이끌며 고전 양식을 모사하던 교육에서 벗어나 구조와 재료, 사회적 조건을 분석하는 스튜디오 교육을 강화했다.
마르셀 브로이어도 하버드에 합류했고, 두 사람은 1938년부터 1941년까지 공동 사무소를 운영했다. 매사추세츠주 링컨의 그로피우스 하우스와 여러 주택을 함께 설계했다.
1938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바우하우스 1919–1928》을 조직했다. 허버트 바이어가 전시 공간과 그래픽을 설계했고, 이세 그로피우스는 자료 수집과 도록 편집에 참여했다. 전시는 학교가 폐쇄된 뒤 미국에서 바우하우스의 성과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로피우스는 1944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유럽에서 망명한 건축가와 디자이너를 미국의 대학과 박물관, 설계사무소에 연결하며 바우하우스의 교육과 인맥을 미국에 옮겼다.
TAC와 말년의 활동
1945년 그로피우스는 일곱 명의 젊은 건축가와 디 아키텍츠 콜래버러티브(The Architects Collaborative, TAC)를 설립했다. 사무소 이름에서 특정 건축가의 이름을 빼고 여러 파트너가 설계 책임을 나누는 구조를 세웠다.
TAC는 하버드 대학원 센터와 아테네 미국대사관, 뉴욕 팬암 빌딩, 대학시설과 기업 본사, 해외 도시계획을 맡았다. 프로젝트의 규모가 커질수록 구조와 설비, 조경, 예술 작품을 여러 전문가가 함께 조율하는 방식이 중요해졌다.
그로피우스는 1952년 하버드에서 정년퇴임한 뒤에도 TAC에서 활동했다. 바우하우스의 기록을 보존할 기관 설립을 지원했고, 1964년부터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건물을 설계했다.
1969년 7월 5일 보스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도면과 편지, 사진, 출판 자료는 하버드와 바우하우스 아카이브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 나뉘어 보존돼 있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
그로피우스는 회화와 조각, 공예, 건축을 서로 떨어진 분야로 가르치는 방식을 바꾸려 했다. 여러 분야가 실제 건물과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만나야 한다고 봤다.
초기에는 장인의 공방과 도제 교육을 참고했다. 이후에는 수공예로 만든 시제품을 공장에서 반복 생산할 수 있도록 재료와 구조, 제작 공정을 다듬는 방향으로 학교를 바꿨다.
그가 말한 예술과 기술의 통합은 기계를 무조건 찬양하자는 주장이 아니었다. 디자이너가 재료와 생산 방식을 이해하고, 기술자와 기업도 형태와 사용자를 함께 고려하도록 두 영역을 연결하려는 원칙이었다.
예비과정과 공방 교육
바우하우스 학생은 특정 분야를 바로 선택하지 않고 예비과정에서 색과 형태, 재료, 공간의 기초를 익혔다. 정해진 역사 양식을 따라 그리기보다 종이와 나무, 금속, 유리, 직물의 성질을 직접 시험했다.
예비과정 뒤에는 금속과 목공, 직조, 도자, 벽화, 인쇄 같은 공방으로 들어갔다. 학생은 도면만 그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재료를 자르고, 접고, 짜고, 조립하며 형태가 실제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배웠다.
구체적인 수업 방식은 요하네스 이텐과 라슬로 모호이너지, 요제프 알베르스, 파울 클레를 비롯한 교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그로피우스의 역할은 여러 수업과 공방이 하나의 학교 안에서 연결되도록 구조를 짜는 데 있었다.
협업과 공동 저자
그로피우스는 건축을 한 사람의 영감만으로 완성할 수 없다고 봤다. 건축가와 예술가, 기술자, 제작자, 기업이 각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설계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체 방향을 정하고 여러 참여자가 맡을 일을 나누는 조직 운영에 강했다. 아돌프 마이어와의 초기 사무소, 바우하우스 공방, 마르셀 브로이어와의 파트너십, TAC는 이 원칙을 서로 다른 규모로 시험한 조직이었다.
공동 작업은 보조 인력이 한 사람의 생각을 실행하는 방식과 달라야 했다. 각 참여자가 자신의 판단으로 결과에 영향을 주고, 설계 책임도 함께 나누는 구조를 목표로 했다.
표준화와 대량생산
그로피우스는 주택 부족과 높은 건축비를 해결하려면 부품과 치수, 공사 순서를 표준화해야 한다고 봤다. 현장에서 모든 부품을 하나씩 만드는 대신 공장에서 규격 부품을 생산하고 현장에서는 빠르게 조립하려 했다.
표준화는 집을 한 가지 형태로 통일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았다. 같은 부품을 조합해 가족 규모와 대지에 맞는 여러 평면을 만들 수 있어야 했다. 자동차 생산처럼 공정은 반복하되 최종 구성에는 변화를 줄 수 있다고 봤다.
건축 현장도 생산라인처럼 조직했다. 전문 작업팀이 여러 집을 차례로 이동하며 같은 공정을 반복하고, 현장에서 제작한 부품은 소형 철도와 크레인으로 운반했다.
기능에 따른 구성
그로피우스는 외관을 먼저 정한 뒤 내부를 끼워 넣는 방식을 피했다. 교육과 생산, 주거, 이동처럼 서로 다른 기능을 분석하고, 필요한 면적과 빛, 동선을 정한 뒤 건물의 덩어리를 나눴다.
하나의 대칭축에 모든 공간을 맞추기보다 기능이 다른 건물을 비대칭으로 배치하고 다리와 복도로 연결했다. 외부에서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워도 내부 활동이 각 부분의 크기와 창, 구조를 결정하도록 했다.
유리는 단순히 현대적인 인상을 주는 장식 재료가 아니었다. 작업 공간에 빛을 들이고 내부 활동을 외부에 드러내며, 벽이 주던 무게와 폐쇄감을 줄이는 외피로 사용했다.
생활 환경 전체의 설계
그로피우스는 건축을 벽과 지붕에 한정하지 않았다. 가구와 조명, 직물, 색채, 그래픽, 조경이 한 생활 환경 안에서 서로 맞아야 한다고 봤다.
모든 물건을 한 사람이 직접 디자인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디자이너가 공통된 목표와 치수, 재료를 공유하고, 건축가는 전체 과정을 조정해야 했다.
이 방식은 손잡이처럼 작은 부품부터 건물과 주거단지의 배치까지 연결했다. 이후 기업 디자인과 전시 디자인, 대형 설계사무소의 협업 구조에도 영향을 줬다.
지역 재료와 현대 생활
그로피우스는 근대건축을 어느 지역에나 같은 흰색 건물을 세우는 방식으로 보지 않았다. 새로운 구조와 생활 방식을 적용하되 지역의 기후와 익숙한 재료를 함께 사용할 수 있다고 봤다.
미국에서는 목재 사이딩과 벽돌 굴뚝, 자연석 벽, 방충망을 친 포치처럼 뉴잉글랜드 주택에 익숙한 요소를 받아들였다. 여기에 유리블록과 크롬 난간, 넓은 판유리 같은 산업 재료를 결합했다.
전통적인 외형을 그대로 복제하기보다 지역에서 실제로 쓰이던 재료와 생활 방식을 새로운 공간 구성 안에 다시 배치했다.
주요 작업
파구스 공장
파구스 공장(Fagus Factory, 1911~1925)은 독일 알펠트의 신발 골 제조공장이다. 발주자 카를 벤샤이트는 기존 회사와 다른 진보적인 기업 이미지를 원했고, 에두아르트 베르너가 마련한 초기 계획을 그로피우스와 아돌프 마이어에게 다시 다듬도록 맡겼다.
그로피우스와 마이어는 공장의 기본 배치를 모두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주요 건물의 외관과 모서리, 창, 증축 부분을 바꿨다. 벽돌 기둥 사이를 넓은 유리창으로 채우고, 모서리에서는 무거운 기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 유리면이 가볍게 꺾여 이어지도록 했다.
전통적인 공장이 두꺼운 벽과 작은 창으로 작업장을 감쌌다면 파구스 공장은 내부 깊숙이 자연광을 들였다. 계단과 작업 공간의 움직임도 바깥에서 일부 볼 수 있었다.
벽돌과 유리, 철제 창틀은 별도의 역사 장식 없이 재료의 색과 구조를 그대로 드러냈다. 이후 유리 커튼월과 투명한 산업 건축으로 이어질 외피 구성을 앞서 보여준 건물이다.
독일공작연맹 모범 공장
독일공작연맹 모범 공장(Model Factory and Office Building, 1914)은 쾰른에서 열린 독일공작연맹 전시회를 위해 그로피우스와 아돌프 마이어가 설계한 임시 건물이다.
중앙에는 벽돌로 감싼 사무 공간을 두고 양쪽 끝에는 유리로 둘러싼 나선형 계단을 세웠다. 관람객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과 철제 구조가 바깥에서 그대로 보였다.
사무동의 무거운 대칭 구성과 공장동의 넓은 유리면이 한 건물 안에서 대비됐다. 기존 공장 건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와 여전히 남아 있던 기념비적 구성이 함께 나타난다.
전시가 끝난 뒤 철거됐지만 유리 계단탑은 산업시설의 이동과 구조를 외부에 드러낸 초기 근대건축의 대표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좀머펠트 주택
좀머펠트 주택(Haus Sommerfeld, 1920~1922)은 그로피우스와 아돌프 마이어가 베를린의 목재 사업가 아돌프 좀머펠트를 위해 설계한 주택이다.
재활용한 선박용 목재와 티크 부재를 사용했고, 외관에는 짙은 목재와 경사지붕을 적용했다. 이후 데사우에서 나타난 흰색 벽과 평지붕보다 표현주의와 공예의 성격이 강했다.
바우하우스의 목공과 벽화, 직조, 유리, 조각 공방이 실내 제작에 참여했다. 요스트 슈미트는 계단과 문 주변의 목조 부조를 맡았고, 학생과 교사는 가구와 직물, 색유리, 조명을 만들었다.
여러 공방이 한 건물을 함께 완성한 초기 바우하우스 공동 프로젝트였다. 학교의 창립 선언에서 제시한 건축과 공예의 결합을 실제 주택으로 시험했다.
바우하우스 데사우
바우하우스 데사우(Bauhaus Building Dessau, 1925~1926)는 학교와 공방, 행정실, 강당, 식당, 학생 기숙사를 여러 동으로 나눠 연결한 교육시설이다.
공방동은 철근콘크리트 골조 바깥에 넓은 유리 파사드를 둘렀다. 유리 뒤로 작업실과 층 사이 구조가 비쳤고, 낮에는 주변 풍경을 반사하고 밤에는 내부 활동을 밖으로 드러냈다.
직업학교동과 공방동 사이에는 행정실이 들어간 다리를 걸쳤다. 강당과 무대, 식당은 접이식 벽을 열어 하나의 큰 공간으로 바꿀 수 있었다. 기숙사동에는 작은 발코니를 반복해 각 방의 위치를 외부에 드러냈다.
건물에는 하나의 정면이 없다. 어느 방향에서 접근하는지에 따라 공방동과 다리, 기숙사, 강당의 관계가 달라진다. 학교 안의 기능과 이동을 여러 건물의 조합으로 보여준다.
실내에는 마르셀 브로이어의 가구와 금속 공방의 조명, 히네르크 셰퍼의 색채 계획, 공방에서 제작한 손잡이와 집기가 적용됐다. 건물 자체가 학교의 교육과 제작 능력을 보여주는 전시장이 됐다.
데사우 퇴르텐 주거단지
데사우 퇴르텐 주거단지(Dessau-Törten Housing Estate, 1926~1928)는 저렴한 주택을 빠르게 공급하기 위해 그로피우스 사무소가 설계한 연립주택 단지다. 세 차례에 걸쳐 314가구를 지었으며, 주택 면적은 57㎡부터 75㎡까지였다.
밝은색 직육면체 주택을 두 채 또는 여러 채씩 연결하고, 가로와 세로로 이어지는 창으로 외관을 나눴다. 집 뒤에는 과일과 채소를 기르거나 작은 가축을 키울 수 있는 350㎡에서 400㎡ 규모의 텃밭을 배치했다.
현장의 모래와 자갈로 콘크리트 부품을 만들고, 소형 철도와 크레인으로 운반했다. 전문 작업팀은 여러 집을 차례로 옮겨 다니며 같은 공정을 반복했다. 한 방의 천장 부재를 조립하는 데 약 45분이 걸릴 정도로 작업을 세분화했다.
공사 시간을 줄였지만 목표했던 저가 주택을 처음부터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했다. 단열과 방음, 결로 문제도 나타났고 입주자들은 생활에 맞춰 창과 외벽, 출입구를 고쳤다. 표준화된 원안과 실제 거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주는 주거 실험이다.
그로피우스 하우스
그로피우스 하우스(Gropius House, 1938)는 발터와 이세 그로피우스가 매사추세츠주 링컨에 지은 가족 주택이다. 미국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그로피우스가 뉴잉글랜드의 기후와 가족 생활에 맞춰 설계했다.
흰색 목재 사이딩과 벽돌 굴뚝, 자연석 기단처럼 지역 주택에 익숙한 재료를 사용했다. 여기에 유리블록과 크롬 난간, 금속 나선계단, 넓은 판유리, 흡음 석고를 결합했다.
욕실과 부엌은 배관을 공유하도록 가까이 모아 공사비를 줄였다. 남서쪽에는 방충망을 친 포치를 배치해 햇빛과 바람을 받으면서도 벌레를 막았다.
이세 그로피우스는 집 주변의 정원과 조경을 가꿨다. 잔디와 화단을 둔 정돈된 구역 바깥에는 기존 과수원과 돌담, 초지를 남겨 건물과 주변 풍경이 단계적으로 이어지게 했다.
유럽의 근대건축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미국의 목조주택과 산업 재료를 함께 사용한 정착기의 대표작이다.
하버드 대학원 센터
하버드 대학원 센터(Harvard Graduate Center, 1948~1950)는 그로피우스와 디 아키텍츠 콜래버러티브가 설계한 학생 기숙사와 공용시설 단지다. 시설은 1950년대 초 차례로 문을 열었다.
기숙사동을 하나의 거대한 건물로 합치지 않고 서로 다른 각도로 배치해 마당과 보행로를 만들었다. 붉은 벽돌과 콘크리트, 유리를 사용해 기존 하버드 교정과 재료를 연결하면서 평지붕과 비대칭 배치를 적용했다.
공용시설에는 장 아르프와 호안 미로, 요제프 알베르스를 비롯한 현대미술가의 작품을 설치했다. 건축과 미술, 가구를 한 생활 환경 안에 배치하려는 구상이 미국 대학시설로 이어졌다.
프로젝트는 TAC 구성원이 역할을 나눠 설계했다. 그로피우스 개인의 작품보다 집단 사무소가 대형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방식을 보여준 초기 사례다.
팬암 빌딩
팬암 빌딩(Pan Am Building, 1958~1963)은 그로피우스와 피에트로 벨루스키, 에머리 로스 앤드 선스가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북쪽에 설계한 초고층 업무시설이다. 현재는 메트라이프 빌딩으로 불린다.
길게 늘인 팔각형 평면과 프리캐스트 콘크리트 외벽을 사용했다. 반복되는 창과 콘크리트 패널이 거대한 건물을 하나의 격자로 묶고, 좁은 대지에 넓은 사무실 바닥을 확보했다.
저층부에는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과 주변 거리, 고가도로를 연결하는 통로와 에스컬레이터를 배치했다. 철도역 주변에 몰리는 보행자와 대규모 사무실 이용자를 한 건물 안에서 나누려 했다.
개장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업무용 건물 가운데 하나였지만 파크 애비뉴의 시야를 막고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을 압도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협업과 표준화를 앞세운 후기 작업이 거대 기업 건축으로 바뀐 사례다.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바우하우스 아카이브(Bauhaus-Archiv, 1964~1979)는 바우하우스의 자료를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계획한 박물관이다. 그로피우스와 TAC는 처음에 다름슈타트의 경사지에 들어설 건물을 설계했다.
전시실 위에는 한쪽으로 빛을 끌어들이는 둥근 톱니 모양 지붕을 반복했다. 낮게 펼쳐진 전시 공간과 관리시설을 중앙 공간으로 연결하고, 주변 지형과 한 덩어리처럼 이어지게 계획했다.
다름슈타트 건립이 무산된 뒤 사업은 베를린의 평평한 부지로 옮겨졌다. 그로피우스가 세상을 떠난 뒤 알렉스 치비아노비치와 한스 반델이 새 부지에 맞춰 전시실의 방향과 진입 램프, 배치를 수정했다.
건물은 1976년 착공해 1979년 문을 열었다. 그로피우스의 후기 설계와 후대 협업자의 수정이 함께 남은 건축이며, 바우하우스의 역사를 보존하는 기관 자체가 집단 설계로 완성된 사례다.
영향 관계
페터 베렌스와 독일공작연맹
페터 베렌스는 그로피우스가 건축과 산업디자인을 하나의 조직 안에서 경험하게 한 인물이다. AEG의 공장과 제품, 그래픽, 광고를 함께 설계하며 기업이 사용하는 건축과 시각 요소를 연결했다.
그로피우스는 이 방식을 한 기업에서 교육기관으로 넓혔다. 바우하우스 공방에서 제품을 개발하고 기업과 생산 계약을 맺은 방식은 베렌스 사무소에서 경험한 산업 협업과 이어진다.
독일공작연맹은 좋은 디자인과 기계 생산을 연결하려는 조직이었다. 그로피우스는 이곳의 전시와 토론에 참여하며 규격화된 생산과 디자이너의 판단을 어떻게 함께 가져갈지 고민했다.
아돌프 마이어
아돌프 마이어는 그로피우스의 초기 대표작을 함께 만든 핵심 파트너다. 파구스 공장과 독일공작연맹 모범 공장, 좀머펠트 주택을 공동 설계했고 바우하우스 초기에도 건축과 기술 교육에 참여했다.
마이어는 도면과 기술 설계, 실무 운영을 맡아 그로피우스의 구상을 실제 건물로 구체화했다. 두 사람의 작업을 그로피우스 한 사람의 작품으로만 소개하면 구조와 세부 설계, 현장 조율에 들어간 협업을 놓치게 된다.
두 사람의 협업은 그로피우스가 이후 학교와 사무소에서 공동 설계를 강조하는 기반이 됐다.
이세 그로피우스
이세 그로피우스는 1923년 발터 그로피우스와 결혼한 뒤 그의 작업과 바우하우스 운영에 깊이 참여했다. 편지와 일정을 관리하고 글을 편집·번역했으며, 홍보와 바우하우스 후원회 운영을 맡았다.
영국과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도 강연과 출판, 전시를 준비하고 바우하우스 인맥을 유지했다. 1938년 뉴욕 전시에서는 자료를 정리하고 도록 편집에 참여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도면과 편지, 사진을 여러 기관에 기증했다. 그로피우스 하우스와 내부 물건도 보존기관에 넘겨 건축과 실제 생활을 함께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그로피우스의 국제적 활동과 사후 기록은 이세의 편집과 행정, 보존 작업을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와 학생
그로피우스는 서로 다른 작업 방식을 가진 예술가와 디자이너를 학교에 불러 모았다. 요하네스 이텐과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라슬로 모호이너지, 오스카 슐레머는 색과 형태, 재료, 사진, 무대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가르쳤다.
그로피우스가 모든 수업과 제품을 직접 만든 것은 아니다. 예비과정과 공방의 구체적인 방법은 교사와 학생이 실험하며 발전시켰다.
마르셀 브로이어의 강관 가구와 마리안네 브란트의 조명, 군타 슈퇼츨과 아니 알베르스의 직물은 학교가 산업체와 협업할 수 있는 제품군을 만들었다. 이 작업들이 모이면서 바우하우스는 교육기관을 넘어 디자인 생산 조직으로 알려졌다.
그로피우스는 하나의 양식을 지시하는 디자이너보다 서로 다른 실험이 한 학교 안에서 이어지게 만든 교장과 기획자에 가까웠다.
하네스 마이어와 미스 반 데어 로에
그로피우스의 뒤를 이은 하네스 마이어는 디자인을 사용자의 필요와 비용, 과학적 분석에 더 직접적으로 맞췄다. 건축 부서를 강화하고 노동자 주택과 공공시설을 학생과 함께 설계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1930년부터 학교를 이끌었다. 정치 활동을 억제하고 건축 중심의 전문 교육을 강화했지만 나치 정권의 압박 속에서 1933년 학교를 폐쇄했다.
세 교장은 같은 바우하우스를 서로 다르게 운영했다. 그로피우스는 예술과 공예, 산업의 조직에 집중했고, 마이어는 사회적 기능과 비용을 앞세웠으며, 미스는 건축 중심의 전문 교육으로 바꿨다.
그로피우스 재임기만으로 바우하우스 전체를 설명하면 이후 두 교장이 만든 교육과 설계의 변화를 놓치게 된다.
하버드와 미국의 건축 교육
그로피우스는 하버드에서 고전 양식의 모사보다 문제 분석과 스튜디오 협업을 앞세웠다. 건축과 조경, 도시계획, 구조를 연결해 학생이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함께 일하도록 가르쳤다.
마르셀 브로이어를 비롯한 유럽 출신 건축가와 디자이너를 미국의 교육기관과 박물관에 연결했다. 바우하우스 자료도 하버드의 주요 디자인 컬렉션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교실을 거친 학생과 젊은 건축가는 미국과 유럽,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학과 사무소로 퍼졌다. 바우하우스 교육은 독일 학교를 그대로 복제하기보다 기초 조형과 스튜디오 수업, 협업 설계의 형태로 이어졌다.
디 아키텍츠 콜래버러티브
디 아키텍츠 콜래버러티브는 그로피우스가 평생 주장한 집단 작업을 실제 사무소 구조로 옮긴 조직이다. 젊은 건축가가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만 따르지 않고 파트너로 설계에 참여하도록 했다.
프로젝트마다 담당 파트너와 팀을 구성하고 정기적인 회의를 통해 설계를 조정했다. 하버드 대학원 센터와 아테네 미국대사관, 여러 대학시설과 기업 건축은 이 구조 안에서 완성됐다.
아테네 미국대사관에서는 현대적인 콘크리트 구조와 고대 그리스 건축을 떠올리게 하는 열주, 중정을 결합했다. TAC는 같은 근대건축의 원칙을 지역과 건물의 역할에 맞춰 다르게 적용했다.
다만 대외 홍보와 수주에서는 그로피우스의 명성이 큰 역할을 했다. 집단 저작을 표방했지만 주요 건물이 계속 그의 작품으로 소개되는 모순도 남았다.
수상·전시 이력
1938년 뉴욕 바우하우스전
뉴욕 현대미술관은 1938년 12월부터 1939년 1월까지 《바우하우스 1919–1928》을 열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전시를 조직했고, 허버트 바이어가 공간과 그래픽을 설계했다. 이세 그로피우스는 도록 편집에 참여했다.
전시는 회화와 건축 모형, 무대 의상, 사진, 타이포그래피, 가구, 조명, 직물, 금속 제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바우하우스를 특정한 건축 양식보다 여러 공방과 교육 실험이 결합된 학교로 미국에 소개했다.
전시와 도록은 오랫동안 미국에서 바우하우스를 이해하는 기준이 됐다. 하지만 그로피우스가 재임한 1919년부터 1928년까지만 다루면서 하네스 마이어와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이끈 마지막 5년은 제외했다.
주요 수상
영국왕립건축가협회는 1956년 그로피우스에게 로열 골드 메달을 수여했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근대건축과 디자인 교육을 확산한 공로를 인정한 결정이었다.
미국건축가협회는 1959년 그로피우스에게 AIA 골드 메달을 수여했다. 개인 건축 작품뿐 아니라 바우하우스와 하버드에서 바꾼 건축·디자인 교육도 평가에 포함됐다.
1961년에는 프랑크푸르트시 괴테상을 받았다. 당시 그로피우스는 개인 사무소보다 TAC의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에게 주어진 영예와 집단 설계를 강조한 작업 방식 사이에는 긴장이 남았다.
세계유산과 아카이브
바우하우스 데사우와 마이스터 주택은 1996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관련 건축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2017년에는 데사우의 발코니형 공동주택과 베르나우 노동조합학교가 세계유산 범위에 추가됐다.
그로피우스와 아돌프 마이어가 설계한 파구스 공장은 2011년 별도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현재도 산업시설로 사용되며 초기 근대 공장 건축의 외관과 구조를 보존하고 있다.
베를린 바우하우스 아카이브와 하버드의 관련 컬렉션은 도면과 편지, 사진, 출판물, 사무소 기록을 보관한다. 개인 작품뿐 아니라 학교와 공방, 사무소의 협업 과정을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자료다.
반응과 평가
위상과 영향
그로피우스는 개별 건축가보다 학교와 설계 조직을 통해 더 넓은 영향을 남겼다. 바우하우스의 예비과정과 공방 교육은 세계 여러 디자인학교의 기초교육과 스튜디오 수업에 반영됐다.
재료를 직접 시험하고 시제품을 만든 뒤 산업체와 양산 가능성을 검토하는 과정도 현대 디자인 교육의 기본 절차로 자리 잡았다. 건축과 제품, 그래픽, 공간을 함께 다루는 종합 디자인학교의 구조도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았다.
파구스 공장과 바우하우스 데사우, 그로피우스 하우스는 보존과 운영을 이어가며 실제 공간을 통해 그의 작업을 보여준다. 공방에서 개발한 조명과 가구, 직물도 전시와 재생산을 통해 계속 유통된다.
그로피우스의 가장 큰 유산은 하나의 건축 양식보다 디자인을 가르치고 조직하는 방식에 남아 있다. 디자이너가 개인의 감각만으로 작업하지 않고 재료와 생산, 기술, 사회적 필요를 함께 다뤄야 한다는 기준을 세웠다.
디자인 반응
그로피우스의 초기 건축은 유리와 가는 구조를 사용해 공장과 학교를 밝고 개방적인 공간으로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파구스 공장과 바우하우스 데사우의 유리면은 작업 공간의 빛과 움직임을 건물 외관으로 끌어냈다.
반대쪽에서는 넓은 유리와 반복되는 격자, 흰색 벽이 차갑고 획일적으로 보인다고 지적한다. 비슷한 형태가 여러 나라에서 반복되면서 바우하우스 건축은 지역과 기후를 지운 국제 양식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로피우스 하우스는 이런 평가를 단순하게 만들지 않는다. 목재와 벽돌, 자연석, 방충망 포치를 사용해 지역의 재료와 생활 방식을 현대적인 공간 구성에 넣었기 때문이다. 그의 원칙은 흰색 콘크리트 건물을 반복하는 것보다 새 조건에 맞는 재료와 기능을 조합하는 데 가까웠다.
후기 대형 건축은 반응이 더 크게 갈린다. 하버드 대학원 센터는 기존 교정의 벽돌과 근대적인 배치를 함께 사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팬암 빌딩은 거대한 크기와 반복적인 외벽이 뉴욕의 거리와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을 압도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비판
바우하우스는 건축을 모든 예술이 모이는 최종 목표로 내세웠지만 그로피우스 재임기 대부분에는 정식 건축 부서가 없었다. 독립된 건축 교육은 1927년에야 시작됐다. 창립 선언에서 내세운 목표와 실제 교육 사이에 긴 간격이 있었던 셈이다.
학교는 성별에 관계없이 학생을 받는다고 선언했지만 실제 공방 배치는 평등하지 않았다. 여성 학생은 대체로 직조 공방을 권유받았고 건축과 목공, 금속처럼 사회적 권위가 높았던 분야에 들어가기 어려웠다.
직조 공방은 군타 슈퇼츨과 아니 알베르스, 오티 베르거를 중심으로 학교에서 가장 성공적인 산업 협업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성과는 성별에 따른 진로 제한이 없었다는 증거가 아니다. 평등한 교육을 내세운 학교가 당시의 보수적인 성 역할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이 따른다.
표준화된 주택이 약속한 가격과 품질을 항상 실현한 것도 아니다. 데사우 퇴르텐에서는 공사를 빠르게 진행했지만 초기 주택의 가격을 충분히 낮추지 못했고, 단열과 방음, 결로 문제가 나타났다. 입주자들은 생활 방식에 맞춰 창과 출입구, 외벽을 바꿨다.
이 변화는 원안을 훼손한 행동으로만 볼 수 없다. 규격화된 평면과 외관이 실제 가족의 생활과 증축 요구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업 생산의 질서와 시간이 지나며 달라지는 주거 생활이 충돌했다.
협업을 강조한 그로피우스 자신도 공동 저자의 역할을 가리는 중심 인물이 됐다. 파구스 공장에서 아돌프 마이어와 에두아르트 베르너가 맡은 부분, 바우하우스 건물에서 공방 구성원이 만든 실내와 제품, 미국 작업에서 TAC 파트너가 맡은 설계는 그로피우스의 이름보다 늦게 알려졌다.
1938년 뉴욕 바우하우스전도 그로피우스 재임기를 학교의 중심 역사로 굳혔다. 하네스 마이어가 강화한 사회주택과 과학적 설계,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이끈 마지막 시기는 전시에서 빠졌다.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의 유산을 보존하는 동시에 자신의 시대를 중심으로 역사를 편집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팬암 빌딩은 집단 설계와 대규모 업무공간이 도시 안에서 어떤 문제를 만들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건물 내부의 보행과 사무실 효율을 정교하게 계획했지만, 도시의 스카이라인과 거리에서는 지나치게 큰 덩어리로 남았다.
그로피우스는 스타 건축가보다 협업 조직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와 TAC의 복잡한 작업은 다시 한 명의 거장 서사로 압축됐다. 사람과 조직을 연결한 능력이 그의 가장 큰 업적이면서, 함께 일한 사람의 이름을 가린 원인이 됐다는 모순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