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치테리오 (Antonio Citterio)
개요
안토니오 치테리오(Antonio Citterio)는 B&B 이탈리아, 비트라, 플로스, 악소어 등 유수 브랜드를 오가며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건축, 가구, 오피스, 욕실 시스템을 통합적으로 설계해 온 이탈리아의 디자이너 겸 건축가다. 1950년 밀라노 인근 메다에서 태어나 1972년 개인 사무소를 열었고, 1975년 밀라노 폴리테크닉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파트리시아 비엘(Patricia Viel)과 공동 설립한 230명 규모의 다학제 건축·디자인 스튜디오 ACPV ARCHITECTS의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치테리오의 작업은 특정한 곡선이나 고유한 색채로 요약되지 않는다. 대신 구조의 노출 여부, 쿠션과 프레임의 비례, 사용자의 착석 자세 등을 극도로 세밀하게 조율하는 기능적 완결성에서 그의 인장이 드러난다. 1979년 발표한 '디에시스(Diesis)' 소파에서는 금속 골조와 쿠션을 형태적으로 완전히 분리했고, 1997년 '찰스(Charles)' 소파에서는 얇은 역L자형 다리 위에 좌석을 낮게 띄워 거실의 시각적 하중을 줄였다. 2011년 비트라의 '그랑 르포(Grand Repos)' 라운지체어에서는 거대한 업홀스터리 내부에 복잡한 리클라이닝 메커니즘을 은폐하며 기술과 형태의 융합을 보여줬다.
B&B 이탈리아와의 파트너십은 치테리오 커리어의 가장 굵직한 축이다. 1987년 콤파소 도로를 수상한 '시티(Sity)' 소파 시스템부터 롱셀러 '찰스'에 이르기까지 브랜드의 중추적 이미지를 빚어냈다. 1993년부터는 막살토(Maxalto)의 단독 디자이너이자 아트디렉터로 활동해 왔으며, 2026년 현재 B&B 이탈리아 공식 기록 기준 막살토, 아르클리네아(Arclinea), 아추체나(Azucena)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겸임하고 있다.
2026년 현재에도 현역으로서 신작 발표를 주도한다. 비트라를 통해 체중 감응형 자동 조절 오피스 체어 'ACX' 라인업을 확장하고 있으며, 악소어를 통해서는 조작부와 수납 공간을 벽 내부에 통합 매립한 샤워 시스템 '인카바(Incava)'를 공개하는 등 기술을 공간의 표면 뒤로 숨기는 건축적 접근을 지속하고 있다.
약력·연혁
치테리오는 1970년대 초반 파올로 나바(Paolo Nava)와 연대해 산업 가구 설계에 뛰어들었다. B&B 이탈리아가 주도하던 폴리우레탄 성형 및 금속 프레임 기술을 도입하여, 전통적인 목재 프레임과 스프링 기반의 쿠션 조합에 머물던 소파의 구조적 해방을 이끌었다. 1979년 디에시스 소파는 다이캐스트 금속 부품과 보강 스틸 바를 외부 뼈대로 노출시키고 연질의 쿠션을 결합해 이 시기의 구조적 혁신을 대변하는 역작으로 꼽힌다. 1980년대에는 단일형 소파의 개념을 해체한 시티 모듈 소파 시스템을 통해 거실 내 동선과 거리를 제어하는 공간 시스템을 고안해 냈고, 이로 인해 1987년 B&B 이탈리아에 세 번째 콤파소 도로 수상의 영예를 안겼다.
동시에 건축 프로젝트를 병행하며 공간적 시야를 넓혔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6년까지 미국 출신 건축가 테리 드완(Terry Dwan)과 함께 유럽 및 일본 등지에서 건축 실무를 전개하며, 가구를 독립된 조형물이 아닌 건축적 외연의 연장선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체화했다. 1993년 막살토의 단독 디자이너로 합류했을 당시, B&B 이탈리아와는 차별화된 목재 마감, 클래식한 비례, 장식적 요소를 차용하며 제조사의 체질을 분리 및 다듬어내는 탁월한 아트디렉션 역량을 증명했다. 1997년 찰스 소파의 메가히트는 얇은 역L자형 다이캐스트 알루미늄 다리를 통해 묵직한 이탈리아 소파의 물리적 둔탁함을 걷어내고 거실의 공간감을 재편하는 획기적 전환점이었다.
2000년에 이르러 건축가 파트리시아 비엘과 인테리어 및 건축 스튜디오를 공동 설립했다. 현재 ACPV ARCHITECTS Antonio Citterio Patricia Viel로 명명된 이 조직은 230명 이상의 건축, 공간, 가구 전문 인력을 아우르며, 제품 디자인과 건축 설계를 분절하지 않고 호텔, 오피스, 고급 주거 단지 프로젝트를 단일 조직망 안에서 융합 처리한다. 이와 함께 비트라와의 장기적 유대를 통해 오피스 환경 가구에 천착해 왔으며, 2011년 그랑 르포에 이어 2023년 이후 지속 확장 중인 ACX 오피스 체어 시리즈는 사용자의 물리적 조작을 최소화하고 의자 스스로 움직임에 반응하는 메커니즘을 구현해 냈다. 2003년부터 시작된 악소어와의 협업 역시 2026년 인카바 매립형 샤워 시스템으로 진화하며, 기능적 요소의 돌출을 극도로 제어하고 욕실 기기를 보이지 않는 건축적 환경으로 수렴시키는 일관된 방향성을 유지하고 있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치테리오의 디자인 언어는 쿠션의 연성(軟性)과 그것을 지지하는 구조재의 강성(剛性)을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분리하는 구조적 솔직함에 있다. 디에시스가 금속 골조를 외부로 돌출시켜 힘의 전달 과정을 노출했다면, 찰스는 극도로 얇은 알루미늄 다리를 통해 소파의 거대한 매스를 바닥으로부터 부유시켰다. 둔탁한 패브릭 내부에 프레임을 은폐하던 관행을 깨고, 어떤 요소가 하중을 지탱하고 몸을 지지하는지 직관적인 비례로 증명한다.
단일 기물의 조형성에 매몰되기보다 공간의 거시적 맥락을 선제적으로 타진하는 접근법도 확고하다. 아톨(Atoll)이나 누누(Noonu)와 같은 모듈 시스템 소파는 확정된 실루엣을 강요하지 않고 개별 플랫폼, 등받이, 암레스트를 레고 블록처럼 분리해 주거 면적과 동선에 맞춰 재조립할 수 있는 무한한 유연성을 제공한다. 이는 가구를 독립적 조각품이 아닌 사용자의 생활 반경을 설계하는 구획 시스템으로 다루는 치테리오의 지향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악소어 역시 그와의 프로젝트 과정에서 제품 자체의 미학보다 건축적 환경과의 유기적인 결합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그의 기조를 강조한 바 있다.
메커니즘이 고도화될수록 외형의 복잡성은 오히려 소거된다. 그랑 르포의 정교한 동기화 리클라이닝 기구, ACX의 체중 감응형 자동 조절 메커니즘, 악소어 인카바의 일체형 매립 시스템 등 첨단 기술이 요구되는 제품일수록 표면의 조작부와 이음새는 간결하게 압축된다. 기술력을 기계적인 디테일로 과시하는 디자인을 배격하고, 사용자가 기계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채 무의식적인 편의를 누리도록 배려하는 태도다. 이와 함께 찰스(1997), 디에시스(1979)가 여전히 현행 카탈로그의 주축을 점유하듯, 특정 시대의 장식적 유행에 편승하지 않은 기본 비례의 견고함이 치테리오 디자인의 긴 수명을 담보한다. 또한 막살토에서는 전통 목재를, B&B 이탈리아에서는 금속과 폴리우레탄 모듈을, 비트라에서는 인체공학 메커니즘을 특화하듯 파트너사의 본질과 기술력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화법을 변주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의 탁월한 균형감을 지녔다.
주요 작업
악소어 인카바(AXOR Incava)
2026년 악소어를 통해 발표된 샤워 시스템이다. 온도 조절계, 핸드샤워기, 수납용 니치를 단일한 매립 구조로 융합하고, 벽면 돌출을 11mm로 최소화한 얇은 소프트 스퀘어 플레이트 조작부만 남겼다. 기술적 메커니즘을 건축의 피부 뒤로 완전히 감춰버리는 치테리오의 공간 철학이 반영된 최신 프로젝트다.
ACX 오피스 체어 시리즈
2023년 비트라와 론칭 후 2026년 라인업을 확장 중인 오피스 가구다. 복잡한 수동 조작 없이 체중과 움직임에 자동 감응하도록 설계되어 다중 사용 환경에 최적화되었다. 재활용 소재 비율, 유지 관리 시스템, 부품 수급까지 설계 조건에 포함시켜 긴 수명 주기를 전제로 한 지속 가능한 디자인이다.
모듈 소파 B&B 아톨(B&B Atoll)
2018년 B&B 이탈리아를 위해 고안한 모듈 시스템 소파다. 세 가지 규격의 베이스 플랫폼 위에 시트, 코너, 셰즈롱, 오토만 등을 결합하여 공간 조건에 대응하는 맞춤형 구성을 가능케 한다. 소파를 단품이 아닌 공간 내 구획 시스템으로 다루는 방법론이 응집된 결과물이다.
라운지체어 그랑 르포(Grand Repos)
2011년 비트라에서 출시한 리클라이닝 체어로 인체공학 체어의 기술적 외형을 부드러운 가정용 라운지체어의 형상으로 탈바꿈시켰다. 두터운 쿠션 내부에 사용자의 하중에 반응해 저항력이 조절되는 동기화 메커니즘을 내장하여 기술과 디자인의 완벽한 융합을 이뤄냈다.
시스템 소파 찰스(Charles)
1997년 출시 이후 B&B 이탈리아의 부동의 롱셀러로 자리 잡은 모듈 소파다. 역L자형의 얇은 다이캐스트 알루미늄 다리가 소파의 거대한 매스를 바닥으로부터 띄워 올리고, 길게 뻗은 단일 좌석 시트로 구조적 경쾌함을 부여해 현대 거실 가구 비례의 전형을 정립했다.
모듈 소파 시스템 시티(Sity)
1980년대 B&B 이탈리아가 폴리우레탄 폼의 실험적 조형을 이탈리아 가정에 보급하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곡선과 직선이 결합된 좌석 모듈과 테이블을 조합하여 TV 시청, 휴식, 대화 등 거실 내 다양한 행위를 조율하는 혁신적 시스템으로 1987년 콤파소 도로를 수상했다.
디에시스(Diesis) 소파
1979년 파올로 나바와 공동 디자인한 상징적 모델이다. 업홀스터리 내부의 뼈대를 외부 다이캐스트 금속과 보강 스틸 바로 노출시키고 푹신한 쿠션을 얹어냈다. 구조와 완충재를 분리한 솔직한 조형으로, 초기 치테리오의 구조주의적 가구 설계 방향성을 예고한 기념비적 작업이다.
영향 관계
치테리오는 1960년대 B&B 이탈리아가 개척한 산업 가구의 폴리우레탄 성형 공법과 금속 구조 시스템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세대다. 파올로 나바와의 초기 연대를 시작으로, 50년 이상 특정 제조사의 R&D 조직과 장기간 밀착하여 기술적 완성도를 끌어올린 점은 그의 작업 체질을 결정지은 핵심적 자양분이다. 공간과 가구의 결합이라는 태도는 테리 드완과의 협업에 이어 파트리시아 비엘과의 건축 스튜디오 공동 운영을 통해 확고해졌다. 그가 수장으로 있는 ACPV는 1인의 작가주의 스튜디오가 아닌, 비엘의 크리에이티브 전략 지휘 아래 수백 명의 건축가, 인테리어 디자이너, 그래픽 전문가가 유기적으로 연대하는 현대적 다학제 설계 조직의 표본이다. 이탈리아 디자인사에서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번뜩이는 시그니처 폼의 제시라기보다, 다수의 파트너십과 제조사의 R&D에 깊숙이 개입해 브랜드의 전체 제품군과 장기적 체질을 다듬어내는 '마스터 디자이너'의 롤모델을 정립했다는 데 있다.
수상·전시 이력
치테리오는 1987년(시티 소파)과 1994년(모빌 랩 시스템) 두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 디자인계 최고 영예인 콤파소 도로(Compasso d'Oro)를 거머쥐었다. 2008년에는 산업 디자인계 전반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왕립예술협회(RSA)가 수여하는 '왕립산업디자이너(Royal Designer for Industry, RDI)' 칭호를 부여받았다. 실무 설계뿐만 아니라 후학 양성에도 힘써, 2006년부터 2016년까지 스위스 멘드리시오 건축아카데미(Accademia di Architettura di Mendrisio)에서 건축 설계 교수로 재직했다.
반응과 평가
안토니오 치테리오는 반세기에 가까운 경력에도 불구하고, 2026년 현재 비트라, 악소어, B&B 이탈리아, 막살토 등 유럽 최고 제조사의 핵심 라인업을 책임지는 압도적인 현역이다. 그의 생명력은 시류를 타는 자극적 스타일에 편승하지 않고, 제조의 엔지니어링, 고도의 인체공학 메커니즘, 공간 구성이라는 산업 디자인의 본질적 명제에 끈질기게 천착한 결과로 귀결된다. 그의 가구는 강력한 자기 주장을 내세워 주변을 압도하지 않되, 완벽에 가까운 비례와 마감 디테일로 대형 공간에서도 흔들림 없는 존재감을 확보한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찰스 소파에서 입증되듯, 형태적 침묵으로 공간 전체의 조화를 완성하는 것이 치테리오 디자인의 가장 큰 힘이다.
반면 파격적인 조형 실험을 배제하고 극도로 안전한 비례와 구조의 완성도에만 치중하여, 하이엔드 시장에 국한된 보수적인 럭셔리 문법에 갇혀 있다는 날 선 비판도 공존한다. 화려한 외형을 은폐하고 복잡한 기술을 내재화하는 특유의 설계 기조 역시 딜레마를 안고 있다. ACX 체어나 그랑 르포 등 첨단 메커니즘이 적용된 기기들은 유지 보수나 장기적 부품 교체 시 사용자가 직관적으로 대응하기 까다로운 구조적 폐쇄성을 띠기 때문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2026년 현재 파트너사들이 제품의 장기 수명 주기와 정비 용이성을 설계 단계부터 강도 높게 요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울러 단일 제품의 완성도가 치테리오 개인의 역량만으로 과대포장되는 것은 경계 대상이다. 디에시스의 초기 구조적 성취는 파올로 나바와의 연대였으며, ACX와 아톨 같은 거대 시스템 가구는 사실상 파트너 제조사 내부 엔지니어링 팀과의 방대한 협업 산물이다. 건축 프로젝트 또한 비엘과 ACPV 다수 실무진의 조직적 역량에 빚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테리오의 업적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산업 가구의 원형을 설계한 후 지난 50년간 파트너사와 치밀한 개선을 거듭하며 특정 가구가 어떻게 시대의 풍화를 견디고 클래식으로 안착할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