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낭 부훌렉 (Ronan Bouroullec)
개요
<img src="https://d2xsxph8kpxj0f.cloudfront.net/310519663429662740/ffcjRzrXsTCDKgX6s8aDwC/articles/1786249640872-30b9d51898e01519.webp" alt="" data-orientation="original" data-original-src="https://d2xsxph8kpxj0f.cloudfront.net/310519663429662740/ffcjRzrXsTCDKgX6s8aDwC/articles/1786249642393-4a4c74609beae6b2.webp" width="600" />
© Samuel Kirszenbaum
로낭 부훌렉(Ronan Bouroullec)은 가구와 조명, 세라믹, 텍스타일부터 공공 설치 조형물까지 아우르며 산업디자인과 순수 미술의 간극을 꾸준히 지워 온 프랑스의 디자이너다. 1971년 브르타뉴 캥페르에서 태어나 파리 국립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95년 자신의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1998년부터 동생 에르완 부훌렉과 함께 20여 년간 세계적인 디자인 듀오로 활동했으며, 2023년을 기점으로 공동 작업을 마무리하고 각자 독립적인 노선을 걷고 있다.
형제 듀오 시절의 작업은 공간을 유연하게 구획하는 가구부터 베르사유궁 샹들리에 같은 굵직한 공공 프로젝트를 망라한다.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온 만큼 이 시기의 결과물을 로낭 개인의 단독 성과로 분리해 기록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2023년 솔로 전향 이후, 로낭의 작업은 단일한 재료에 집중하는 세라믹 조명이나 한정판 공예, 평면 드로잉을 직물과 입체로 직결시키는 방향으로 한층 깊어졌다. 양산형 가구 설계와 갤러리 에디션 작업을 병행하는 현재의 그는 제품 디자이너와 공예 작가 사이의 경계를 과거보다 훨씬 느슨하게 풀어내고 있다.
약력·연혁
파리 국립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한 로낭은 1995년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며 독자적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1996년 디자인한 솔리플로르 화병이 퐁피두센터 영구 컬렉션에 소장되며 일찍이 조형 감각을 인정받았고, 이를 계기로 산업 생산품 개발의 길로 들어섰다. 1998년 동생 에르완 부훌렉이 스튜디오에 합류하며 1999년부터 공동 파트너 체제가 확립되었다. 형제는 비트라(Vitra)의 롤프 펠바움과 교류하며 공간 시스템 가구로 영역을 넓혔고, 이후 플로스, 헤이, 아르텍 등 굴지의 브랜드와 협력하며 2000년대와 2010년대 유럽 디자인 씬을 장악했다. 점차 규모를 키워 마이애미 누아주 프롬나드, 샹젤리제 분수 등 도시를 채우는 대형 공공 설치물까지 섭렵했다.
성공적인 듀오 활동을 이어오던 두 사람은 각자의 연구 방향과 관심사가 달라짐에 따라 2023년 공식적으로 스튜디오 활동을 분리했다. 독립 이후 로낭은 오랫동안 축적해 온 평면 드로잉을 제품 설계의 보조 도구를 넘어선 독립적 예술 작업으로 격상시켰다. 2024년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레조낭스(Résonance)》는 조명, 세라믹, 직물, 드로잉을 위계 없이 펼쳐 보이며 그의 새로운 전환점을 시각적으로 증명했다. 2025년 이후에도 비트라, 무티나 등과 함께 산업 제품과 한정판 에디션을 꾸준히 선보이며 조형 작가이자 산업 디자이너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다지고 있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밑그림에서 출발한 선과 형태
로낭의 디자인은 구체적인 제품 도면이 아닌 일상적인 손그림에서 태동한다. 오랫동안 매일매일 종이 위에 반복해 온 선, 색채, 리듬의 실험이 가구의 실루엣이나 세라믹의 곡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직선과 곡선이 만나는 책상의 세부가 타이포그래피의 부리 모양(세리프)이나 펜의 필압에서 기원하는 식이다.
쓰임새만 남긴 구조와 재료의 시간
조형을 과장하기보다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을 때까지 뼈대만 남기는 직관적인 구조를 지향한다. 이와 더불어 완벽하게 통제된 공산품의 마감보다 공예적인 거칠음과 자연스러운 노후화를 디자인의 일부로 포용한다. 세라믹 표면에 손으로 유약을 바르거나, 찍히고 색이 짙어지는 소나무의 무른 성질을 결함이 아닌 재료 고유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최근 솔로 작업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작은 단위의 반복과 연결
완성된 거대한 형태를 단번에 찍어내는 대신, 단순한 모양의 작은 부품을 무수히 반복 조립해 전체의 규모를 완성하는 방식을 즐겨 쓴다. 나뭇가지 모양의 플라스틱을 엮어 공간의 막을 형성하거나, 입체적인 도자기 조각을 벽돌처럼 꿰맞춰 입면의 질감을 만드는 구조다. 사용자가 직접 엮고 조립하는 과정을 통해 공간의 밀도와 쓰임새를 스스로 결정하게 한다.
주요 작업
플라스틱 공간 모듈, 알그 (Algues, 2004)
로낭과 에르완 형제가 비트라를 위해 공동으로 완성한 플라스틱 모듈 체계다. 해초나 식물 줄기를 연상시키는 작은 조각들을 고리로 엮어 커튼이나 파티션처럼 거대한 면을 형성한다. 가구를 고정된 덩어리에서 해방시켜, 사용자가 자신의 공간에 맞춰 엮어내는 자율적이고 유기적인 그물망으로 재정의한 듀오 시절의 핵심 마스터피스다.
방이 되는 가구, 알코브 소파 (Alcove Sofa, 2006)
비트라와 협업한 형제 듀오의 대표작으로, 소파의 등받이와 측면 패널을 극단적으로 높게 설계했다. 단순히 앉는 도구를 넘어, 사방이 개방된 사무실이나 넓은 거실 한가운데에 시선과 소음을 차단하는 독립된 '작은 방'을 만들어낸다. 소파가 벽이자 건축적 파티션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가구의 기능을 확장한 사례다.
도자기 테이블 조명, 세라미크 (Céramique, 2023)
솔로 독립 후 플로스(Flos)에서 발표한 테이블 조명으로, 받침대부터 기둥, 갓까지 모든 부위를 세라믹 단일 재료로 통일했다. 갓이 향하는 각도에 따라 세 가지 쓰임새로 나뉘며, 납 성분이 없는 특수 유약을 사용해 도자기 표면에 깊고 투명한 빛의 반사를 끌어냈다. 기계적인 매끄러움 대신 흙과 유약의 공예적 물성을 조명 디자인 전면에 내세웠다.
선만 남긴 책상, 쿠리어 데스크 (Courier Desk, 2025)
비트라에서 생산한 콤팩트 규격의 데스크다. 복잡한 수납이나 육중한 구조를 모두 벗겨내고, 얇은 목재 상판과 이를 지탱하는 알루미늄 다리뼈만 간결하게 남겼다. 측면에서 바라보는 조형이 세리프 서체의 끝단 모양을 닮았다는 점에 착안해 서체 이름인 '쿠리어'를 붙였으며, 로낭의 평면 드로잉 선이 입체 가구로 직결된 명쾌한 결과물이다.
한정판 세라믹 거울, 카루셀 (Carrousel, 2026)
이탈리아 무티나(Mutina)와 함께 선보인 조형적인 화병 및 거울 에디션이다. 탄성 밴드, 알루미늄, 유색 유리를 세라믹 구조체와 이질적으로 결합했으며, 전 공정을 수작업으로 마감해 전 세계 25점만 한정 생산한다. 대량 생산을 전제로 하는 산업 디자인의 문법에서 벗어나 순수 조형물과 갤러리 공예 피스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긴 최근의 행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영향 관계
로낭은 알바 알토의 부드러운 유기적 곡선과 재료에 대한 감각, 그리고 자크 타티의 영화에서 엿보이는 일상을 관찰하는 예리하고 따뜻한 시선에서 깊은 자양분을 얻었다고 밝힌다. 1999년 비트라의 롤프 펠바움과의 조우는 스튜디오의 스케일을 소형 오브제에서 거대한 건축적 공간 시스템으로 팽창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커리어 전반을 지탱하는 가장 두터운 뼈대는 동생 에르완 부훌렉과의 20년 듀오 활동이다. 이 시기의 작업은 두 사람의 경계 없는 합작품이므로 로낭 개인의 기여도만 떼어내 판단할 수 없다. 2023년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로낭은 산업 공정의 완벽함 이면에 억눌려 있던 자신의 순수 드로잉 감각과 수공예적 물성 탐구에 더욱 짙게 침잠하고 있다.
수상·전시 이력
듀오 체제로 활동하던 2011년 이탈리아 최고 권위의 황금콤파스상(Compasso d'Oro)을, 2014년 런던 디자인 메달을 공동 수상하며 현대 디자인사의 굵직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들의 결과물은 파리 퐁피두센터, 런던 디자인뮤지엄, 뉴욕 현대미술관(MoMA) 등 세계 유수의 기관에 영구 소장되어 있다. 2023년 자신의 드로잉 스케치를 집대성한 서적 《Day After Day》 출간을 기점으로 개인전의 문을 열었고, 2024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솔로 데뷔를 알리는 회고전 격의 개인전 《레조낭스(Résonance)》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 전시를 통해 선보인 다수의 신작 오브제와 스케치들이 퐁피두센터 소장품으로 새롭게 편입되었다.
반응과 평가
로낭 부훌렉은 거대한 명성을 구가하던 형제 듀오의 절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조형 작가이자 디자이너로서 성공적인 제2의 궤도를 안착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2023년 이후 독자적으로 내놓은 조명과 가구들이 상업적으로 훌륭히 자리매김한 동시에, 그가 빚어낸 세라믹 에디션과 드로잉이 미술관의 문턱을 넘으며 산업 생산과 순수 예술의 경계를 가뿐히 지워내고 있다. 지지자들은 그의 솔로 작업이 듀오 시절의 정교한 세련미를 넘어, 흙이나 나무의 거친 물성과 손맛을 숨기지 않는 사적이고 내밀한 매력을 획득했다고 호평한다.
반면, 로낭 개인의 포트폴리오를 다룰 때 과거 알코브 소파나 알그 같은 대표작에서 에르완의 지분을 지우고 단독 창작물처럼 오독하는 역사적 오류는 비평계가 가장 경계하는 지점이다. 아울러 솔로 독립 이후 극소수 한정판으로 제작되는 갤러리 피스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보편 다수를 위한 산업 디자인의 본분을 내려놓고 고상한 미술 수집 시장으로 편입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적 시선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글로벌 가구 브랜드의 실제 양산 프로젝트를 부지런히 병행함으로써 대량 생산과 수공예, 공산품과 예술품 사이의 이분법적 분류에 갇히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