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미하레스 (Rafael Mijares)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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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미하레스 알세레카(Rafael Mijares Alcérreca)는 멕시코의 건축가, 교육자, 화가다. 1924년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났고, 2015년 11월 9일 사망했다.

국내 표기는 라파엘 미하레스가 가장 자연스럽다. 풀네임은 라파엘 미하레스 알세레카로 옮기는 편이 좋다. 스페인어에서 Mijares의 j는 영어 j가 아니라 h에 가까운 소리로 난다. 그래서 ‘미자레스’보다 ‘미하레스’가 발음에 가깝다.

미하레스는 페드로 라미레스 바스케스의 협업자로 자주 언급된다. 하지만 단순한 보조 설계자로만 보기 어렵다.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 멕시코 현대미술관, 에스타디오 아스테카, 세계박람회 멕시코관, 멕시코시티 시장 건축, 외교부 청사, 이베로아메리카나 대학교 산타페 캠퍼스처럼 20세기 중반 멕시코 공공 건축의 핵심 프로젝트에 반복해서 참여했다.

미하레스가 주로 맡은 대상은 개인 주택보다 박물관, 경기장, 시장, 정부 청사, 학교, 박람회관 같은 공공시설이었다. 그의 작업에는 큰 지붕, 안뜰, 물, 콘크리트 구조, 벽화와 조각이 자주 들어간다. 많은 사람이 모이고 흩어지는 동선을 먼저 잡고, 그 안에 멕시코의 역사와 도시 생활을 보여주는 장면을 넣는 방식이었다.

약력·연혁

라파엘 미하레스는 멕시코시티 산타마리아 라 리베라 지역에서 태어났다. 여덟 형제 중 셋째였다. 1942년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건축학교에 들어갔고, 1948년에 건축학위를 받았다.

그는 학교에서 마리오 파니, 엔리케 델 모랄, 호세 비야그란, 아우구스토 H. 알바레스에게 배웠다. 이들은 병원, 학교, 정부 청사, 도시 주거를 통해 멕시코 근대 건축을 넓힌 세대였다. 미하레스는 졸업 뒤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안토니오 파스트라나, 엔리케 카랄, 아우구스토 H. 알바레스, 후안 소르도 마달레노의 사무실에서 일했다.

이후 페드로 라미레스 바스케스의 사무실에 도면 담당자로 들어갔다. 도면 담당자는 설계안을 도면으로 옮기고 세부 치수를 정리하는 실무자다. 미하레스는 이 자리에서 출발해 라미레스 바스케스의 파트너가 됐다. 두 사람의 협업은 30년 넘게 이어졌다.

1954년에는 멕시코시티 노동·사회보장부 청사를 라미레스 바스케스와 함께 설계했다. 이 작업에서 두 사람은 원형과 타원형 평면, 부유식 기초, 분수와 물이 떨어지는 벽면을 시험했다. 이후 박물관과 공공시설에서 다시 나오는 둥근 공간과 물의 사용이 이 시기에 이미 나타났다.

1955년부터 1957년까지는 멕시코시티 시장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라미레스 바스케스, 펠릭스 칸델라, 하비에르 에체베리아, 후안 호세 디아스 인판테와 함께 라 라구니야, 라 메르세드, 테피토, 코요아칸, 아스카포찰코, 아나우악, 발부에나, 산페드로 데 로스 피노스 일대 시장을 계획했다. 자료에 따라 숫자는 12개 또는 15개로 적히지만, 1950년대 중반 멕시코시티 시장 정비 사업의 주요 설계진에 미하레스가 들어간다는 점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다.

1958년에는 브뤼셀 세계박람회 멕시코관에 참여했다. 멕시코관은 전시장과 강당을 갖춘 약 2천 제곱미터 규모의 건물이었다. 입구에는 툴라의 아틀란테 조각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놓였고, 외벽에는 호세 차베스 모라도의 대형 벽화가 들어갔다. 멕시코관은 스페인 정복 이전의 문화와 현대 멕시코를 함께 소개한 전시 건축이었다.

1962년에는 시애틀 세계박람회 멕시코관과 치와와주 시우다드후아레스 예술·역사 박물관에 참여했다. 두 프로젝트 모두 전시, 건축, 조형물이 함께 맞물린 작업이었다. 세계박람회관에서는 외국 관람객이 짧은 시간 안에 멕시코를 이해하도록 건축과 전시를 한 덩어리로 구성했다.

1963년부터 1964년까지는 멕시코 현대미술관과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 작업이 이어졌다. 두 박물관은 모두 멕시코시티 차풀테펙 숲 안에 지어졌고, 1964년에 문을 열었다. 같은 시기 한쪽에서는 고대 멕시코 문화를 다루는 대형 박물관이, 다른 한쪽에서는 20세기 미술을 다루는 현대미술관이 완성됐다.

1964년에는 뉴욕 세계박람회 멕시코관에도 참여했다. 라미레스 바스케스, 후안 호세 디아스 인판테, 에두아르도 테라사스, 하비에르 에체베리아가 함께 이름을 올렸다. 이 작업은 1958년 브뤼셀, 1962년 시애틀에 이어 멕시코가 해외 박람회장에서 자국 문화를 건축과 전시로 소개한 같은 계열의 작업이다.

1966년에는 에스타디오 아스테카가 개장했다. 경기장은 라미레스 바스케스와 미하레스가 설계했고, 1970년과 1986년 FIFA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장소가 됐다. 2026년 월드컵까지 치르면 세 차례 월드컵을 맞는 첫 경기장으로 기록된다.

1968년에는 멕시코시티 나르바르테 지역의 SCOP 중앙통신탑 및 전신국이 완공됐다. 이 건물은 옛 통신공공사업부의 통신 인프라 시설로,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앞두고 위성 통신과 연방 마이크로파 통신망을 다루기 위해 지어졌다. 멕시코 정부의 2023년 예술기념물 지정 문서는 이 건물을 미하레스와 엔지니어 후안 호세 파디야의 작업으로 설명한다.

1970년에는 틀라텔롤코 외교부 청사 작업에도 이름이 올라간다. 라미레스 바스케스와 함께한 대표 공공건축 가운데 하나다. 건물 자체보다 외교부, 박물관, 경기장, 통신시설이 같은 시기에 이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미하레스의 작업은 문화시설에만 머물지 않고 국가기관과 도시 인프라까지 닿았다.

1980년대에는 이베로아메리카나 대학교 산타페 캠퍼스 작업에 관여했다. 1979년 지진으로 기존 캠퍼스가 큰 피해를 입자, 대학은 산타페로 옮길 새 캠퍼스를 추진했다. 당시 총장은 건축학과장을 지낸 미하레스에게 프로젝트를 맡겼고, 미하레스는 프란시스코 세라노 카초를 협업자로 불렀다. 프로젝트는 1983년에 시작해 1984년에 승인을 받았다. 미하레스가 실무에서 물러난 뒤에는 세라노가 설계를 이어갔다.

미하레스는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와 이베로아메리카나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말년에는 회화 작업도 했다. 여러 부고와 약력은 그를 건축가, 학자, 화가로 함께 소개한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기능과 조형

미하레스는 건축이 쓰임새와 조형을 함께 다뤄야 한다고 봤다. 그의 대표작은 관람, 이동, 대기, 집합 같은 행동을 먼저 처리한다. 그다음 큰 지붕, 벽화, 물, 안뜰, 기둥을 배치해 방문자가 기억할 장면을 만든다.

이 방식은 국립인류학박물관에서 뚜렷하다. 방문자는 중앙 안뜰을 기준으로 전시실을 골라 들어간다. 한 방향으로만 따라가는 복도형 박물관이 아니라, 안뜰을 중심으로 여러 전시실이 펼쳐지는 구조다. 관람객이 잠시 쉬고, 방향을 고르고, 다시 전시실로 들어갈 수 있게 했다.

안뜰과 큰 지붕

미하레스가 참여한 박물관 건축에서는 안뜰이 중요하다.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은 전시실을 중앙 안뜰 주변에 배치했다. 방문자는 안뜰에서 건물 전체의 위치를 파악하고, 각 전시실로 이동한다.

안뜰의 중심에는 엘 파라과스가 있다. 엘 파라과스는 스페인어로 ‘우산’을 뜻한다. 한 기둥이 거대한 콘크리트 지붕을 받치고, 지붕 가장자리에서는 물이 떨어진다. 이 구조물은 그늘, 물소리, 기둥 장식, 열린 마당을 한꺼번에 만든다.

멕시코 현대미술관은 같은 해 완공됐지만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잡았다. 국립인류학박물관이 큰 안뜰과 기념비적 지붕을 앞세웠다면, 현대미술관은 둥근 전시실, 유리, 정원, 산책로를 더 많이 썼다. 두 박물관은 같은 차풀테펙 숲 안에 있지만 관람객에게 다른 속도와 분위기를 준다.

콘크리트와 물

미하레스가 활동한 시기의 멕시코 공공 건축은 콘크리트를 적극적으로 썼다. 시장 건축에서는 얇은 콘크리트 지붕이 넓은 판매 공간을 덮었다. 박물관과 경기장에서는 큰 기둥, 긴 처마, 반복되는 벽면이 많은 사람을 받는 구조가 됐다.

물도 자주 쓰였다. 노동·사회보장부 청사에서는 분수와 물이 떨어지는 벽면이 들어갔다. 국립인류학박물관에서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과 연못이 안뜰의 소리와 시야를 바꾼다. 물은 장식으로만 놓이지 않았다. 그늘, 소리, 온도, 이동 방향을 함께 조절하는 요소였다.

예술가와 함께 만든 공공 건축

미하레스의 대표작에는 건축가, 예술가, 엔지니어, 전시 기획자가 함께 들어온다. 브뤼셀 멕시코관에는 호세 차베스 모라도의 벽화가 들어갔다. 시애틀 멕시코관에는 마누엘 펠게레스의 조형 작업이 쓰였다. 국립인류학박물관에는 이케르 라라우리의 조각과 차베스 모라도 형제의 작업이 함께 놓였다.

이 협업은 멕시코 벽화 전통과 근대 건축을 한 공간에 놓는 방식이었다. 벽화와 조각을 건물 뒤에 붙이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입구, 안뜰, 기둥, 전시 동선 안에 예술 작업이 들어갔다. 그래서 미하레스가 참여한 공공 건축은 건물과 전시물이 따로 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박람회관과 국가 홍보

미하레스가 참여한 세계박람회 멕시코관은 멕시코를 외국 관람객에게 소개하기 위한 건축이었다. 브뤼셀, 시애틀, 뉴욕 멕시코관은 모두 짧은 관람 시간 안에 멕시코의 고대 문화, 현대 미술, 산업 발전을 전달해야 했다.

이때 건축은 스페인 정복 이전의 조각, 벽화, 지역 재료, 근대 구조를 한 공간에 모았다. 멕시코가 오래된 문명과 현대 기술을 함께 가진 나라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 방식은 강하게 기억되지만, 국가가 원하는 역사 서사를 건축과 전시가 좁은 전시 틀 안에 넣었다는 비판도 피하기 어렵다.

주요 작업

노동·사회보장부 청사

노동·사회보장부 청사는 라미레스 바스케스와 미하레스가 1954년 멕시코시티에 함께 설계한 공공청사다. 이 작업에서 두 사람은 원형과 타원형 평면, 부유식 기초, 분수와 물이 떨어지는 벽면을 썼다.

이후 박물관과 공공시설에서 반복되는 둥근 공간과 물의 사용이 이 건물에서 먼저 나타났다. 이 청사는 미하레스에게 중요한 초기 공공건축이었다. 주택보다 많은 사람이 쓰는 기관 건물을 다루기 시작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때부터 행정, 대기, 이동, 출입 같은 기능을 큰 평면 안에 배치하는 일을 맡았다.

멕시코시티 시장 프로젝트

멕시코시티 시장 프로젝트는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진행된 도시 시장 정비 사업이다. 1950년대 멕시코시티는 노점과 임시 시장을 정비하고 여러 지역에 고정 시장을 세웠다.

미하레스는 라미레스 바스케스, 펠릭스 칸델라, 하비에르 에체베리아, 후안 호세 디아스 인판테와 함께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시장 목록에는 라 라구니야, 라 메르세드, 테피토, 코요아칸, 아스카포찰코, 아나우악, 발부에나, 산페드로 데 로스 피노스가 자주 언급된다.

코요아칸 시장과 하마이카 시장은 펠릭스 칸델라의 얇은 콘크리트 지붕 사례로도 함께 거론된다. 이 시장들은 기념비적 건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멕시코 근대 건축이 매일 쓰는 상업 공간까지 바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판매대, 통로, 지붕, 환기, 빛을 새로 정리하면서 거리의 장사를 더 안정적인 도시 시설로 옮겼다.

브뤼셀 세계박람회 멕시코관

브뤼셀 세계박람회 멕시코관은 1958년에 지어진 약 2천 제곱미터 규모의 전시 건축이다. 전시장과 강당을 갖춘 건물이었고, 입구에는 툴라의 아틀란테 조각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놓였다. 외벽에는 호세 차베스 모라도의 대형 벽화가 들어갔다.

이 건물은 멕시코를 오래된 문명과 근대 국가가 함께 있는 나라로 소개하려 했다.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게 잡고, 전시와 벽화가 관람객의 시선을 끌게 했다.

박람회관 하나 안에 건축, 전시, 조각, 벽화, 국가 홍보가 함께 들어간 사례다.

시애틀 세계박람회 멕시코관

시애틀 세계박람회 멕시코관은 1962년 라미레스 바스케스와 미하레스가 함께 진행한 박람회 건축이다. 이케르 라라우리가 전시를 맡았고, 아르만도 오르테가의 조각과 마누엘 펠게레스의 조형 벽화가 들어갔다.

브뤼셀 멕시코관이 고대 멕시코 문양과 조각을 강하게 내세웠다면, 시애틀 멕시코관은 현대 미술과 전시 디자인을 더 크게 다뤘다.

두 박람회관을 나란히 보면 미하레스가 건축을 독립된 건물보다 전시 매체로 다뤘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시우다드후아레스 예술·역사 박물관

시우다드후아레스 예술·역사 박물관은 1962년 미하레스와 라미레스 바스케스가 함께 진행한 문화시설이다. 이 박물관은 멕시코 북부 국경 지역의 문화시설로 기획됐다. 전시는 펠리페 라쿠투르가 맡았다.

이 프로젝트는 수도 멕시코시티에만 문화시설을 모으지 않고, 국경 도시에도 현대적 박물관을 세우려 한 작업이었다.

미하레스의 박물관 작업이 차풀테펙의 대형 기관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멕시코 현대미술관

멕시코 현대미술관은 1963년부터 1964년까지 멕시코시티 차풀테펙 숲 안에 지어진 미술관이다. 기본 설계는 페드로 라미레스 바스케스와 카를로스 A. 카사레스 살시도가 맡았고, 미하레스가 협업자로 참여했다. 1964년 9월에 문을 열었다.

건물은 둥근 전시실, 유리벽, 정원, 산책로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원래 계획에는 강당, 도서관, 수장고가 포함됐지만 모두 완성되지는 않았다.

같은 해 문을 연 국립인류학박물관이 고대 멕시코와 국가 서사를 다뤘다면, 현대미술관은 20세기 멕시코 미술을 위한 더 유연한 전시 공간을 목표로 했다.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은 1963년부터 1964년까지 설계와 공사가 진행된 미하레스의 대표작이다. 라미레스 바스케스, 호르헤 캄푸사노와 함께 설계했고, 1964년 9월에 개관했다.

건물은 중앙 안뜰을 두고 전시실을 둘러 배치했다. 안뜰은 엘 파라과스가 있는 그늘진 영역과 연못이 있는 영역으로 나뉜다. 방문자는 안뜰을 지나 각 전시실에 들어가고, 실내 전시와 야외 전시, 정원을 오간다.

엘 파라과스는 한 기둥으로 큰 지붕을 받치는 구조다. 기둥 장식에는 스페인 정복 이전 문명, 독립, 근대 멕시코를 함께 새긴 도상이 들어간다. 물이 지붕에서 떨어지면서 안뜰의 소리와 빛을 바꾼다.

국립인류학박물관은 전시품만 유명한 박물관이 아니라, 건축 자체가 관람 동선을 결정하는 장소가 됐다.

뉴욕 세계박람회 멕시코관

뉴욕 세계박람회 멕시코관은 1964년 라미레스 바스케스, 미하레스, 후안 호세 디아스 인판테, 에두아르도 테라사스, 하비에르 에체베리아가 함께 진행한 전시 건축이다.

1958년 브뤼셀, 1962년 시애틀에 이어 세계박람회 멕시코관 작업이 다시 이어졌다. 뉴욕 멕시코관은 고대 문화, 현대 미술, 산업 발전을 함께 소개한 전시 건축이었다.

이 작업은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을 앞두고 이어진 멕시코의 국가 홍보 디자인과도 맞물린다.

에스타디오 아스테카

에스타디오 아스테카는 1966년에 개장한 축구 경기장으로, 미하레스가 참여한 건축 중 가장 대중적인 장소다. 라미레스 바스케스와 미하레스가 설계했고, 루이스 마르티네스 델 캄포가 프로젝트에 관여했다.

경기장은 10만 명 안팎의 관중을 수용하는 축구장으로 계획됐다. 멕시코시티의 고도, 강한 햇빛, 많은 관중, 방송 중계, 국제 대회를 함께 고려해야 했다. 관중석은 경기장을 그릇처럼 둘러싸고, 외부에서는 콘크리트 구조가 반복된다.

에스타디오 아스테카는 1970년과 1986년 월드컵 결승전을 치렀다. 2026년 월드컵까지 포함하면 세 차례 월드컵을 치르는 첫 경기장이 된다.

건축가의 이름보다 경기 기억이 더 크게 남은 장소지만, 이 경기장은 미하레스의 공공 건축이 스포츠 인프라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잘 알려준다.

SCOP 중앙통신탑 및 전신국

SCOP 중앙통신탑 및 전신국은 1968년 멕시코시티 나르바르테 지역에 세워진 통신 시설이다. 같은 해 10월 6일 개관했다. 멕시코 정부 문서는 이 건물을 미하레스와 엔지니어 후안 호세 파디야의 작업으로 적고 있다.

건물은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앞두고 위성 통신과 연방 마이크로파 통신망을 다루기 위해 지어졌다. 3층 기단 위로 통신탑이 솟고, 콘크리트 구조와 커튼월이 함께 쓰였다.

미하레스가 박물관과 경기장뿐 아니라 통신 인프라도 맡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업이다.

틀라텔롤코 외교부 청사

틀라텔롤코 외교부 청사는 1970년에 지어진 미하레스와 라미레스 바스케스의 대표 공공청사 중 하나다. 건물은 멕시코 외교 행정 기능을 수용하는 대형 사무시설이었다.

이 작업 이후 미하레스의 이력은 문화시설 밖으로도 이어졌다.

박물관, 시장, 경기장, 통신시설, 외교부 청사까지 이어지면서 그는 국가기관과 대중시설을 같은 시기에 다뤘다.

이베로아메리카나 대학교 산타페 캠퍼스

이베로아메리카나 대학교 산타페 캠퍼스는 1980년대에 추진된 대학 이전 프로젝트다. 1979년 지진으로 기존 캠퍼스가 큰 피해를 입자, 대학은 산타페로 옮겨 새 캠퍼스를 세우기로 했다. 당시 총장은 미하레스에게 프로젝트를 맡겼고, 미하레스는 프란시스코 세라노 카초를 협업자로 불렀다.

프로젝트는 1983년에 시작해 1984년에 승인을 받았다. 미하레스는 1984년에 실무에서 물러났고, 세라노가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주 건물은 1983년부터 1988년 사이에 설계와 시공이 진행됐다.

두 사람은 새 캠퍼스에 노출 벽돌을 썼다. 일반 벽돌보다 튼튼한 특수 벽돌을 만들고, 벽돌 벽 안에 기둥을 넣어 거푸집처럼 쓰는 방식도 검토했다. 벽돌은 유지관리를 줄이고 캠퍼스 전체에 통일된 외관을 주는 재료가 됐다.

오늘날 산타페 캠퍼스가 세라노의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어도, 초기 의뢰와 협업자 구성에는 미하레스가 분명히 들어가 있다.

영향 관계

스승과 초기 영향

미하레스는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에서 마리오 파니, 엔리케 델 모랄, 호세 비야그란, 아우구스토 H. 알바레스에게 배웠다. 이 세대는 국제주의 양식을 멕시코에 들여오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학교, 병원, 정부 청사, 도시 주거, 박물관을 통해 근대 국가가 필요로 한 공간을 만들었다.

미하레스는 졸업 뒤 여러 사무실을 거치며 실무를 익혔다. 그는 훗날 엔리케 카랄, 아우구스토 H. 알바레스, 후안 소르도 마달레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개인 작가형 건축보다 조직적인 공공 프로젝트에 강했다.

페드로 라미레스 바스케스와의 협업

미하레스를 말할 때 라미레스 바스케스를 빼기 어렵다. 라미레스 바스케스는 교육시설, 박물관, 경기장, 박람회관, 정부청사, 올림픽 관련 프로젝트를 이끈 멕시코의 대표 건축가였다. 미하레스는 그의 사무실에서 도면 실무자로 시작해 파트너가 됐다.

두 사람의 협업은 멕시코 근대 공공 건축을 실제 건물로 옮기는 과정에서 중요했다. 라미레스 바스케스가 대형 국가 프로젝트를 끌어오는 대표 건축가였다면, 미하레스는 도면, 평면, 재료, 협업 구조를 함께 다룬 실무형 파트너였다.

예술가와 기술자

미하레스의 대표작에는 예술가와 기술자가 함께 들어온다. 펠릭스 칸델라는 시장 건축의 얇은 콘크리트 지붕을 가능하게 했다. 호세 차베스 모라도와 마누엘 펠게레스는 박람회관과 박물관에 벽화와 조형물을 더했다. 이케르 라라우리는 전시와 조각을 맡았다.

이 협업 구조 덕분에 미하레스의 건축은 건물 한 채로만 끝나지 않았다. 구조, 전시, 예술, 동선이 함께 맞물렸다. 국립인류학박물관과 세계박람회관은 이런 방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업이다.

후대와 기억

미하레스의 이름은 라미레스 바스케스보다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참여한 건축은 멕시코시티 사람들이 오래 기억하는 장소가 됐다. 국립인류학박물관은 멕시코를 대표하는 박물관이고, 에스타디오 아스테카는 세계 축구사에서 상징적인 경기장이다. 멕시코 현대미술관과 세계박람회 멕시코관은 20세기 중반 멕시코가 예술, 전시, 국가 홍보를 어떻게 묶었는지 알려준다.

후대가 미하레스를 다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이름은 건물 정면에서 크게 보이지 않을 때가 많지만, 멕시코시티를 대표하는 공공 공간 곳곳에 남아 있다. 미하레스는 한 시대의 국가 프로젝트를 도면, 재료, 동선, 협업 체계로 실제 건물에 옮긴 건축가다.

수상·전시 이력

미하레스는 브뤼셀 세계박람회 멕시코관 이후 벨기에 레오폴드 2세 훈장을 받은 인물로 기록된다. 당시 멕시코 의회 기록에는 라파엘 미하레스 알세레카가 레오폴드 2세 훈장을 수락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내용이 남아 있다.

1984년 소피아 건축 비엔날레에서 은메달과 명예언급을 받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수상 대상 프로젝트는 공개 자료에서 일관되게 확인되지 않는다.

뉴욕 현대미술관은 미하레스를 1924년생 멕시코 건축가로 등록하고 있다. 전시 이력에는 1968년 Architecture of Museums, 2015년 Latin America in Construction: Architecture 1955–1980이 올라 있다. 이 전시들은 미하레스의 작업이 멕시코 국내 건축사뿐 아니라 전후 라틴아메리카 건축을 다루는 국제 전시에서도 다뤄졌다는 점을 알려준다.

반응과 평가

대형 공공건축의 공동 저자

라파엘 미하레스는 유명한 건물을 많이 남겼지만, 대중적 인지도는 작품 규모에 비해 낮다. 많은 대표작이 페드로 라미레스 바스케스의 이름으로 먼저 알려졌기 때문이다. 건축 매체 Arquine도 그를 “큰 작품의 건축가였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덜 알려진 인물”로 설명했다.

이 평가는 미하레스를 이해하는 핵심 단서다. 그는 단독 작가로 강한 서명을 남긴 건축가라기보다, 대형 공공 프로젝트 안에서 평면, 구조, 동선, 협업을 실제로 맞춘 공동 저자에 가깝다. 이 위치 때문에 이름은 덜 보였지만, 참여한 프로젝트는 멕시코 현대 건축의 중심에 남았다.

박물관과 동선

긍정적인 평가는 공공 프로그램을 다루는 능력에서 나온다. 미하레스가 참여한 박물관은 많은 관람객이 이동하는 방식을 먼저 정리했다. 국립인류학박물관은 중앙 안뜰에서 각 전시실로 흩어지는 동선을 만들었다. 멕시코 현대미술관은 둥근 전시실과 정원을 통해 차풀테펙 숲의 산책 동선을 받아들였다.

국립인류학박물관은 미하레스의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고대 멕시코 문화, 현대 국가, 박물관 동선, 조형 예술을 한 공간에 넣었다. 엘 파라과스와 중앙 안뜰은 건축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바로 기억되는 장면이 됐다. 그래서 이 박물관은 전시품뿐 아니라 건물 자체로도 멕시코시티의 대표 장소가 됐다.

시장, 경기장, 통신시설

미하레스의 작업은 문화시설에만 머물지 않았다. 시장 프로젝트는 일상 상업 공간을 도시 시설로 정비했다. 에스타디오 아스테카는 거대한 관중석, 국제 경기, 방송 중계를 감당했다. SCOP 중앙통신탑 및 전신국은 올림픽을 앞두고 통신 인프라를 건축으로 세웠다.

이 세 갈래는 모두 많은 사람이 동시에 쓰거나, 많은 사람의 생활을 뒷받침하는 시설이다. 미하레스의 건축은 개인적 취향보다 공공 사용 조건을 먼저 다뤘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멕시코 근대화기의 도시 인프라 안으로 들어간다.

국가 서사와 비판

비판은 국가가 주도한 공공 건축이라는 조건에서 나온다. 세계박람회 멕시코관과 국립인류학박물관은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를 강한 국가 서사로 묶었다. 스페인 정복 이전의 조각, 벽화, 현대 구조를 함께 놓는 방식은 선명하지만, 복잡한 역사를 하나의 공식적인 역사 화면으로 묶는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브뤼셀 멕시코관처럼 유물과 고대 멕시코 상징을 해외 박람회장에 배치한 방식도 오늘날에는 다르게 볼 수 있다. 당시에는 국가 홍보와 문화 외교의 수단이었지만, 현재 기준에서는 유물 재현, 문화 대표성, 전시 윤리 문제까지 함께 검토하게 된다.

협업자 문제

미하레스는 30년 넘게 라미레스 바스케스와 함께 일했다. 그래서 어느 건물에서 어느 부분을 미하레스 개인의 작업으로 볼 수 있는지 분리하기 어렵다. 이 점은 연구자와 독자 모두에게 남는 문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약점만은 아니다. 20세기 중반 멕시코의 대형 공공 건축은 한 명의 작가가 혼자 만든 결과가 아니었다. 사무실, 공공기관, 예술가, 엔지니어, 전시 기획자가 함께 움직였다. 미하레스의 이름은 그 협업 구조 안에서 다시 볼 때 더 선명해진다.

오늘날 미하레스가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이 위치 때문이다. 그는 건축가 개인의 스타성보다, 국가와 도시가 요구한 거대한 프로그램을 실제 공간으로 바꾸는 능력으로 기억된다. 라파엘 미하레스는 멕시코 현대 공공 건축의 뒷면에서 도면과 협업을 맡았고, 그 결과는 멕시코시티의 박물관, 경기장, 시장, 캠퍼스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