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뮬리에 (Pieter Mulier)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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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othermag피터 뮬리에(Pieter Mulier)는 라프 시몬스와 함께 질 샌더, 디올, 캘빈 클라인을 거치며 실무를 다지고, 알라이아(Alaïa)의 부흥을 이끈 뒤 현재 베르사체(Versace)의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CCO)를 맡고 있는 벨기에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다. 2021년 알라이아에 부임하며 처음 하우스를 단독 지휘했고, 2026년 7월 베르사체의 새로운 수장으로 전격 합류했다.
건축학도 출신인 그는 공간감과 치밀한 비례를 의복에 투영한다. 신체를 낱낱이 드러내는 니트와 보디수트, 완벽한 원형으로 퍼지는 스커트, 정교한 테일러드 재킷을 통해 직물의 물성과 인체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조율한다. 알라이아 재임 시절, 단순히 창립자의 신체 중심적 테일러링을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방, 슈즈, 데님 등 동시대 여성의 옷장에 필수적인 상업 라인을 연달아 흥행시키며 하우스의 외연을 폭발적으로 확장했다.
약력·연혁
1976년 벨기에에서 태어난 뮬리에는 브뤼셀 생뤼크(Saint-Luc)에서 건축과 디자인을 전공했으나 졸업 직후 패션으로 진로를 틀었다. 그의 포트폴리오를 눈여겨본 라프 시몬스에게 발탁되며 디자인 어시스턴트로 커리어를 시작, 훗날 시몬스의 가장 강력한 파트너로 성장했다. 질 샌더 시절 액세서리 라인을 총괄하며 미니멀리즘 철학을 제품 구조로 치환하는 법을 익혔고, 디올과 캘빈 클라인 등 거대 글로벌 하우스에서 오트 쿠튀르와 레디 투 웨어, 캠페인을 총체적으로 조율하며 방대한 실무 내공을 축적했다.
2021년 리치몬트 그룹의 부름을 받아 아제딘 알라이아 타계 이후 공석이던 알라이아의 첫 정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되었다. 2022 S/S 파리 데뷔 컬렉션을 시작으로 레디 투 웨어와 캠페인을 재정비했으며, 테켈 백과 메시 발레 플랫 등 강력한 메가 히트작을 배출했다. 나아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과 파리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 등 예술적 공간에서 런웨이를 펼치며 하우스의 문화적 위상까지 격상시킨 뒤, 2026 F/W 컬렉션을 끝으로 약 5년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2026년 7월 1일, 프라다 그룹의 베르사체 인수가 추진되는 굵직한 변곡점 속에서 베르사체의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로 취임했다. 알라이아에서 증명한 테일러링 감각과 메가 히트작 배출 능력을 바탕으로, 남·여성복 및 액세서리 전반을 지휘하며 화려한 밀라노 하우스의 새로운 챕터를 준비하고 있다.
디자인 철학·언어
신체의 극단적 은폐와 노출 구조
신체를 겹겹이 가리는 거대한 볼륨과 피부처럼 밀착되는 실루엣을 한 착장 내에서 격렬하게 대비시킨다. 얇은 니트와 보디수트가 인체의 굴곡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반면, 조각적인 코트와 스커트는 몸 바깥으로 극적인 공간을 점유한다. 노출 역시 1차원적인 커팅이 아닌 소재의 투명도와 정밀한 패턴 분할을 통해 통제하며, 관능미를 장식이 아닌 옷의 본질적 구조에서 끌어낸다.
건축적 원형과 나선형의 조형
건축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원(Circle)과 나선 등 기하학적 곡선을 패턴과 쇼 공간에 적극 활용한다. 허리를 축으로 완벽한 원을 그리며 퍼지는 스커트, 몸을 둥글게 감싸며 떨어지는 나선형 드레스가 대표적이다. 나아가 구겐하임의 나선형 램프처럼 특정한 건축적 구조를 런웨이 무대로 삼아, 옷의 조형과 공간의 물성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동기화시킨다.
숨겨진 재단과 물성의 통제
복잡한 커팅이나 테크닉을 겉으로 요란하게 과시하지 않는다. 흠잡을 데 없이 몸에 밀착된 재킷의 어깨선이나 니트 드레스의 유려한 곡선 이면에는 고도로 계산된 내부 패턴이 숨어 있다. 창립자의 '드레이핑' 방식을 초경량 니트와 얇은 가죽에 맞게 진화시켜, 인체가 움직일 때 팽창하고 수축하는 직물의 텐션까지 치밀하게 통제한다.
색채의 소거와 실루엣의 강조
블랙, 화이트, 딥 베이지 등 절제된 컬러 팔레트를 선호하며, 색채를 덜어낸 자리를 훌 스커트와 조각적인 아우터의 압도적인 조형미로 채운다. 강렬한 레드나 블루를 사용할 때조차 자잘한 컬러 블록을 섞기보다 룩 전체를 단일 색상으로 덮어버린다. 컬러의 충돌을 배제하고 오직 멀리서도 직관적으로 인지되는 '실루엣' 자체로 룩의 정체성을 선언한다.
런웨이를 지탱하는 상업적 액세서리
가방과 슈즈를 의복의 2차적인 부속품으로 취급하지 않고 전체 착장의 뼈대로 다룬다. 맨발을 비추는 얇은 메시 슈즈는 룩의 가벼움을 극대화하고, 가로로 긴 테켈 백은 신체 측면에 밀착되어 새로운 조형적 수평선을 긋는다. 런웨이의 전위적인 실험과 상업적인 액세서리를 하나의 일관된 디자인 세계관 안에 영리하게 결속시킨다.
주요 디자인
알라이아 2026 F/W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에서 펼쳐진 뮬리에의 알라이아 고별 무대. 지난 5년간 집요하게 탐구해 온 테일러드 재킷, 피부 같은 니트, 원형 스커트 등 자신의 핵심 아카이브를 우아하게 집대성했다. 새로운 화두를 던지기보다 흠잡을 데 없는 핏과 둥근 볼륨으로 하우스에서의 여정을 완벽하게 갈무리하며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알라이아 2025 S/S 구겐하임 컬렉션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의 나선형 건축물과 미국 패션사에서 영감을 받아 전개한 상징적인 런웨이. 찰스 제임스와 클레어 매카델 등 미국 패션 선구자들의 실용적 조형미를 알라이아의 관능적 시각으로 재해석했다. 완벽한 원형 스커트와 후드 드레스가 미술관의 경사로를 따라 유유히 흐르며 건축과 패션의 기념비적인 조우를 연출했다.
알라이아 2025 F/W
직물과 조각의 경계를 완전히 지워버린 컬렉션. 최고급 니트와 가죽, 울 소재를 인체 주위에 둥글게 휘감아 봉제선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유기적인 곡선을 창조했다. 기존의 밀착된 보디콘 실루엣을 넘어, 신체와 옷 사이의 '빈 공간'을 입체적으로 다루는 재단술까지 하우스의 언어로 편입시킨 역작이다.
알라이아 테켈 백
르 테켈(Le Teckel, 2024)은 닥스훈트의 긴 허리를 연상시키는 극단적인 가로 형태의 숄더백이다. 로고를 일절 노출하지 않고 튜블러 바디의 날렵한 비례감만으로 알라이아의 제품임을 각인시켰다. 뮬리에 체제 알라이아의 상업적 볼륨을 견인한 핵심 오브제다.
알라이아 2022 F/W
어깨와 엉덩이를 둥글게 팽창시킨 코트와 인체를 빈틈없이 감싸는 맥시 니트가 극적인 대조를 이룬 시즌이다. 전통적인 모래시계 실루엣에 여성을 가두지 않고, 특정 부위를 기형적으로 과장하거나 완전히 은폐하며 신체와 의복 사이에 새로운 조형적 비례를 대담하게 제안했다.
알라이아 메시 발레 플랫
메리제인 형태의 초경량 플랫 슈즈(2022). 그물망처럼 엮인 메시 소재 어퍼를 통해 맨발의 실루엣이 그대로 투영된다. 청키하고 투박한 어글리 스니커즈가 지배하던 시장에 얇고 관능적인 플랫 슈즈를 던지며, 글로벌 '발레코어(Balletcore)' 트렌드를 견인한 진정한 게임 체인저다.
알라이아 2022 S/S
뮬리에의 알라이아 데뷔 무대. 창립자의 유산인 보디콘 니트와 풍성한 스커트를 보다 가볍고 길쭉한 현대적 비례로 다듬어냈다. 거장의 아카이브를 맹목적으로 복제하지 않고, 피부에 엉겨 붙는 밀착과 바깥으로 터져 나가는 볼륨이라는 자신만의 이분법적 대비를 첫 시즌부터 확고히 선언했다.
디자이너·디자인 조직
라프 시몬스와의 장기 파트너십
약 15년간 라프 시몬스의 최측근으로 활약하며 서브컬처, 음악, 현대미술을 컬렉션의 서사로 엮어내는 기획력을 전수받았다. 남성복 라인부터 질 샌더, 디올, 캘빈 클라인 등 패션 산업의 양극단을 두루 경험하며, 전위적인 편집주의를 상업적인 프로덕트로 직조해 내는 고도의 실무 내공을 체득했다.
아카이브의 해체와 동시대적 진화
거장 아제딘 알라이아를 직접 사사하지는 않았으나, 사람의 몸 위에서 직접 천을 조형하는 창립자의 '드레이핑' 철학을 동시대의 초경량 니트와 데님에 이식했다. 과거의 영광을 박물관에 가두지 않고 메시 플랫과 테켈 백 등 메가 히트작을 연달아 터뜨리며, 후임 디렉터가 하우스의 유산을 지키면서도 파괴적인 상업적 성과를 낼 수 있음을 완벽하게 증명했다.
건축과 패션의 공간적 동기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나선형 건축물이나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의 공간을 룩의 패턴 설계와 동선 기획의 직접적인 영감으로 삼는다. 건축과 패션의 만남을 일회성 세트 디자인이나 얄팍한 마케팅으로 소모하지 않고, 근원적인 비례와 공간감의 심도 있는 탐구로 승화시킨다.
수상·전시 이력
오랜 기간 라프 시몬스의 백스테이지에서 실무형 마스터로 헌신해 왔기에 개인 명의의 글로벌 어워드는 알라이아 단독 부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기록되었다. 2025년 CFDA 어워드에서 '인터내셔널 디자이너 오브 더 이어'를 수상하며 그 궤적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 하우스의 영원한 뮤즈 나오미 캠벨이 직접 시상에 나서며 의미를 더했다.
또한 2024년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내부 램프에서의 쇼, 2026년 파리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 투명 구조물에서의 고별 쇼 등 세계적인 현대미술 및 건축 기관과의 굵직한 조우를 통해 런웨이를 거대한 패션사적 전시로 격상시켰다.
반응과 평가
피터 뮬리에는 라프 시몬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알라이아를 현대적으로 완벽하게 쇄신하고, 현재 베르사체의 조타석에 오르며 커리어의 정점을 구가하고 있다. 알라이아의 무거운 아카이브를 지나치게 '복고적'이거나 '전시용'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육감적인 핏 앤 플레어(Fit & Flare) 룩을 영리하게 유지한 점은 극찬을 받았다. 특히 메시 플랫, 테켈 백, 커브 데님 등 동시대 여성들이 당장 소비하고 싶은 메가 히트 아이템을 쏟아내며, 보디콘 드레스에만 국한되어 있던 하우스의 지평을 폭발적으로 넓혔다.
반면 초기 컬렉션에서는 창립자의 거대한 아우라에 짓눌려 뮬리에 본인만의 날카로운 폼팩터가 부재했다는 혹평도 존재했다. 또한 시그니처인 원형 훌 스커트와 보디수트가 매 시즌 반복 재생산되며 조형적 레퍼토리가 다소 편협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틱톡을 휩쓴 가방과 슈즈의 바이럴 인기가 뮬리에가 공들인 정교한 의복 테일러링의 가치를 역으로 가려버렸다는 점에서, 하이 패션의 잣대가 '작품성'인지 '상업성'인지에 대한 양가적인 평가가 뒤따른다.
그럼에도 업계의 시선은 이미 베르사체에서의 행보로 향해 있다. 화려한 바로크 프린트, 극단적인 노출, 메두사 로고로 대변되는 이탈리안 맥시멀리즘 하우스와 뮬리에 특유의 절제되고 정밀한 건축적 테일러링이 어떻게 융합될 것인지가 관건이다. 알라이아에서 증명한 '미니멀한 정교함'이 베르사체의 도발적인 야생성을 자칫 지루하게 정돈해 버릴 위험과, 반대로 뮬리에가 하우스의 기존 코드에 끌려다닐 우려가 공존한다. 프라다 그룹의 베르사체 인수라는 굵직한 변곡점 속에서 그가 구사할 밸런스 게임이 글로벌 럭셔리 마켓의 가장 뜨거운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