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파올로 피촐리 (Pierpaolo Piccioli)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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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파올로 피촐리(Pierpaolo Piccioli)는 펜디 액세서리 팀과 발렌티노를 거쳐 현재 발렌시아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는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와 함께 발렌티노의 액세서리와 컬렉션을 이끌었고, 2016년부터 2024년까지 단독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하우스를 총괄했다. 2025년 7월 발렌시아가에 합류했다.

피촐리는 선명한 색, 길고 넓게 퍼지는 드레스, 몸과 천 사이에 공간을 두는 쿠튀르 실루엣으로 알려졌다. 발렌티노에서는 로맨틱한 장식과 레드카펫 드레스를 다양한 인종과 성별의 모델에게 입히며 하우스의 고객상을 넓혔다. 발렌시아가에서는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건축적인 재단과 가벼운 볼륨을 자신의 색채와 연결하고 있다.

약력·연혁

로마와 펜디

피에르파올로 피촐리는 1967년 로마에서 태어나 해안 도시 네투노에서 성장했다. 로마 라 사피엔차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한 뒤 유럽디자인학교(IED) 로마 캠퍼스에서 패션을 배웠다. 영화와 사진, 이탈리아 미술에 대한 관심은 이후 컬렉션의 색과 장면을 구성하는 데 영향을 줬다.

1980년대 말 펜디 액세서리 부문에 합류했고, 이곳에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를 만났다. 두 사람은 약 10년 동안 가방과 가죽 제품을 함께 개발했다. 액세서리를 장식품이 아니라 하우스의 판매와 이미지를 동시에 움직이는 핵심 제품으로 다루는 법을 이 시기에 익혔다.

발렌티노 액세서리와 공동 디렉터 체제

피촐리와 치우리는 1999년 발렌티노 가라바니의 요청으로 발렌티노에 합류해 액세서리 라인을 만들었다. 신발과 가방의 비중을 넓히며 의류 중심이던 하우스의 제품 구성을 바꿨다.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은퇴한 뒤 여러 차례의 조직 변화를 거쳐, 두 사람은 2008년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됐다. 레이스, 자수, 긴 드레스와 로마적인 장식을 유지하면서도 짧은 드레스와 플랫 슈즈, 스터드 액세서리를 추가해 고객층을 넓혔다.

단독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2016년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디올로 떠난 후, 피에르파올로 피촐리는 발렌티노의 단독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홀로서기에 나섰다. 그는 하우스 특유의 낭만적인 드레스와 정교한 쿠튀르 공방의 유산을 굳건히 보존하는 동시에, 브랜드의 외연을 과감하게 확장했다. 컬러 팔레트의 경계를 허물고, 런웨이 캐스팅의 다양성을 포용했으며, 남·여성복의 이분법적 구분을 유연하게 풀어냈다.

이러한 단독 체제의 성과는 2019 S/S 오트 쿠튀르와 2022 F/W '핑크 PP(Pink PP)' 컬렉션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시각을 압도하는 강렬한 색채와 다채로운 인물 군상을 런웨이에 올려 발렌티노의 현대적인 서사를 완성한 그는, 2024년 3월을 끝으로 하우스와의 긴 여정을 마무리했다.

발렌시아가

케링과 발렌시아가는 2025년 5월 피촐리를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표했고, 그는 같은 해 7월 10일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뎀나가 약 10년 동안 밀어붙인 스트리트웨어와 오버사이즈, 대중문화 중심의 컬렉션을 이어받는 인사였다.

피촐리는 2025년 10월 2026 S/S RTW로 발렌시아가 데뷔를 치렀다. 2026년 7월에는 하우스의 55번째 오트 쿠튀르를 공개하며 RTW에서 시작한 재단과 소재 실험을 아틀리에 작업으로 이어갔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과감한 컬러 활용

피촐리에게 컬러는 완성된 옷 위에 덧칠하는 2차원적 장식이 아니다. 드레스부터 케이프, 타이츠, 슈즈, 심지어 런웨이 무대까지 단일한 색으로 통일하거나, 채도 높은 보색을 거대한 면적으로 충돌시킨다. 이러한 과감한 배색은 오히려 옷의 예리한 절개선과 풍성한 볼륨감을 더욱 입체적으로 부각하는 구조적 역할을 한다.

그는 하우스의 절대적 유산인 '발렌티노 레드'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딥 퍼플, 틸 그린, 네온 핑크, 머스터드 등 과거 쿠튀르 씬에서 낯설게 여기던 색채를 런웨이 전면에 내세웠다. 특히 의상과 액세서리, 공간 전체를 단 하나의 색으로 집어삼킨 '핑크 PP(Pink PP)' 컬렉션은, 색채 그 자체를 브랜드를 식별하는 가장 강력한 시그니처로 승화시킨 압도적 사례다.

몸과 천 사이, 여백의 실루엣

피촐리의 쿠튀르는 허리를 인위적으로 조이지 않는다. 대신 어깨와 등, 팔 주변으로 직물이 흐를 수 있는 우아한 여백을 둔다. 인체에 억지로 밀착되지 않은 케이프와 맥시 드레스는 착용자가 걸음을 내디딜 때 뒤따라오는 원단의 유기적인 궤적을 통해 비로소 완벽한 형태를 갖춘다. 거대한 리본과 러플 역시 표면에 덧붙여진 1차원적 장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복의 조형적 실루엣을 완성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옷과 신체 사이에 공간감을 부여했던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전설적인 테일러링과 궤를 같이한다. 견고하고 조각적인 외곽선 내부에 직물의 유연한 움직임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두 거장의 철학은 깊이 맞닿아 있다.

경계를 허문 보편적 로맨티시즘

피촐리는 플로럴 모티프, 정교한 레이스, 리본, 깃털, 맥시 드레스 등 전통적으로 여성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로맨티시즘을 '젊고 마른 백인 여성'이라는 고정된 틀에 가두지 않았다. 다채로운 인종, 연령, 체형, 성별을 아우르는 캐스팅을 런웨이에 도입하며, 낭만적인 의복을 향유할 수 있는 주체의 범위를 과감하게 확장했다.

이러한 철학은 멘즈웨어에서도 유효하다. 핑크 팔레트와 플로럴 패턴, 유려한 케이프와 자수 디테일을 남성복 컬렉션에 자연스럽게 이식했다. 이는 전통적 남성성에 대한 공격적인 해체나 도발이라기보다, 아름다운 색채와 수공예적 장식을 성별의 잣대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포용적인 태도에 가깝다.

오트 쿠튀르 아틀리에와의 협업

피촐리는 완성된 스케치를 공방에 일방적으로 넘기지 않는다. 재단사, 자수 장인, 모델과 끊임없이 피팅을 거듭하며 인체 위에서 직접 형태를 조율한다. 천을 몸에 대고 길이와 볼륨을 미세하게 조정하며, 의복을 지탱하는 복잡한 내부 골조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숨긴다.

그의 컬렉션에는 막대한 시간이 소요되는 자수와 깃털 공예가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장인의 기교를 미시적인 디테일에만 가둬두지 않는다. 수천 장의 꽃잎을 중첩시키거나 깃털을 거대한 면적으로 팽창시키는 등 멀리서도 직관적으로 인지되는 압도적인 스케일로 키워, 아틀리에의 수공예적 노동 자체가 룩의 전체 실루엣을 지배하도록 만든다.

하우스 아카이브의 현대적 진화

피촐리는 하우스의 과거 아카이브를 직설적으로 복제하는 대신, 창립자가 의복을 구축했던 근원적인 원리를 탐구한다. 발렌티노 고유의 색채와 로마 특유의 장식성을 계승하는 동시에,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철학을 연상시키는 인체와 직물 사이의 여백, 건축적인 재단 방식을 조형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는 이러한 접근을 단순한 '오마주'가 아닌, 과거의 작업 방식을 동시대적으로 잇는 연속성의 개념으로 정의한다. 역사적인 아카이브의 실루엣을 직관적으로 보존하되, 현대적인 소재와 과감한 비례감, 다변화된 런웨이 캐스팅을 접목하여 과거의 유산이 현재의 시제로 호흡하게 만든다.

주요 작업

발렌시아가 55번째 오트 쿠튀르

피촐리가 발렌시아가(Balenciaga) 합류 후 처음으로 선보인 55번째 오트 쿠튀르 컬렉션(2026). 인체를 3D 스캐닝하여 내부의 골조를 정밀하게 설계하고, 그 위에 얇고 견고한 가죽 셸(Shell)을 입혀 코르셋의 뼈대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고도의 테일러링을 선보였다.

바이오 테크놀로지 기반의 암실크(AMSilk), 새롭게 개발한 네오 가자르(Neo Gazar), 셀룰로오스 스팽글, 수작업으로 파쇄한 꽃잎과 검은 수탉 깃털 등 혁신적인 신소재를 대거 투입했다. 외관은 금욕적일 만큼 절제되어 있으나, 내부의 복잡한 구조 설계와 소재 실험을 통해 극강의 가벼움을 획득했다. 발렌시아가의 쿠튀르 아틀리에를 하우스 전체의 첨단 재료 연구실로 격상시킨 상징적인 컬렉션이다.

발렌시아가 2026 S/S RTW

피촐리의 발렌시아가 데뷔 무대. 그는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특정 아카이브 드레스를 1차원적으로 복각하는 대신, 옷을 짓는 근본적인 재단 방식과 인체를 둘러싼 '공간감' 자체에 접근했다.

포플린 셔츠와 코트는 어깨와 등 뒤로 공기를 머금은 듯한 여유로운 볼륨을 형성했고, 얇게 가공된 가죽은 패브릭처럼 유연하게 접혔다. 아카이브의 핵심인 가자르 소재를 네오 가자르로 교체하여 조형미와 경량화를 동시에 꾀했다. 뎀나(Demna) 체제의 과시적인 로고 플레이와 거대한 스니커즈를 걷어내고, 의복 본연의 절개선과 볼륨감을 런웨이 전면에 되돌려 놓았다.

발렌티노 2022 F/W RTW ‘핑크 PP’

글로벌 색채 연구소 팬톤(Pantone)과 협력해 조향한 맹렬한 네온 핑크를 컬렉션 전반에 도배한 시즌이다. 핑크 피스들을 제외한 나머지 룩은 철저히 블랙으로 통일하여, 관객의 시선이 오롯이 실루엣과 텍스처의 변주에만 꽂히도록 유도했다.

미니드레스, 와이드 팬츠 수트, 케이프, 플랫폼 슈즈는 물론 남성복 코트까지 핑크의 단일 지배하에 두었다. 핑크를 여성복의 낭만적인 포인트 컬러로 국한하지 않고 멘즈웨어, 액세서리, 리테일 매장, 캠페인 전체로 확장하며 발렌티노의 새로운 시각적 아이덴티티로 승화시켰다.

발렌티노 2019 S/S 오트 쿠튀르

피촐리 시대 특유의 '포용적 캐스팅'을 상징하는 서사적 컬렉션. 무려 39명의 흑인 모델이 런웨이를 장악했고, 나오미 캠벨(Naomi Campbell)이 관능적인 블랙 시어 드레스를 입고 피날레를 장식했다.

거대한 플로럴 모티프, 고채도의 케이프, 풍성한 러플과 깃털 장식이 각기 다른 톤의 피부색 위에서 얼마나 다채로운 뉘앙스를 발산하는지 증명했다. 유럽 쿠튀르 씬이 오랫동안 답습해 온 백인 중심주의적 여성상을 정면으로 붕괴시키면서도, 하이 패션 특유의 압도적인 화려함은 한 치도 잃지 않았다.

발렌티노 2017 S/S RTW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와 결별한 후 홀로 지휘봉을 잡은 첫 여성복 런웨이.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기괴하고 몽환적인 회화와 영국 디자이너 잔드라 로즈(Zandra Rhodes)의 그래픽을 차용해, 길고 유려한 드레스 위에 별, 새, 식물, 기하학 패턴을 수놓았다.

공동 체제에서 구축했던 길고 가벼운 실루엣의 뼈대는 유지하되, 장식의 기원과 컬러 팔레트를 대폭 확장했다. 이 컬렉션을 통해 치우리의 부재 속에서도 발렌티노 하우스를 완벽하게 통솔할 수 있음을 업계에 각인시켰다.

락스터드

2010년, 치우리와의 듀오 체제에서 탄생시킨 발렌티노의 메가 히트 액세서리 라인. 피라미드 형태의 정교한 메탈 스터드를 가방, 스트랩 슈즈, 브레이슬릿 가장자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도열시켰다.

거친 펑크 서브컬처의 전유물이던 스터드를 로마 팔라초 건축물의 보스(Boss) 장식처럼 기하학적이고 규칙적으로 정제했다. 로맨틱한 레이스 드레스에 날 선 록 시크적 텐션을 부여했으며, 발렌티노의 가방 및 슈즈 비즈니스 볼륨을 기하급수적으로 팽창시킨 일등 공신이다.

영향 관계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펜디와 발렌티노에서 무려 20년 이상 호흡을 맞춘 크리에이티브 파트너. 두 사람은 액세서리 사업을 폭발적으로 키워냈고, 낭만적인 맥시 드레스에 플랫 슈즈와 락스터드 백을 믹스 매치하며 발렌티노의 고객층을 훨씬 젊고 동시대적인 영역으로 확장했다. 피촐리의 서정적인 색채와 볼륨감이 치우리의 직관적인 메시지 및 커머셜 감각과 완벽한 시너지를 이뤘다.

치우리가 디올로 이적한 후 두 사람의 지향점은 명확히 갈라졌다. 치우리가 페미니즘 슬로건과 사회적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피촐리는 색채의 확장, 캐스팅의 다양성, 쿠튀르 실루엣의 순수성을 통해 포용의 가치를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데 몰두했다.

발렌티노 가라바니와 로마의 하우스

창립자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확립한 시그니처 레드, 우아한 이브닝드레스, 로마 특유의 장식주의, 셀러브리티 드레싱의 유산을 온전히 계승했다. 단, 과거의 엄격한 우아함을 한층 가볍고 넉넉한 실루엣으로 이완시키고, 컬러의 스펙트럼과 런웨이 캐스팅을 현대적으로 확장했다.

파리 쿠튀르의 문법과 차별화되는 로마 기반 아틀리에 특유의 독자적인 수공예 기술은 피촐리의 작업 전반을 지탱하는 강력한 뿌리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발렌시아가 합류 이후, 창립자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남긴 가자르 소재의 혁신, 조형적인 코트, 인체와 의복 사이의 독립된 여백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이를 본인의 특기인 풍성한 드레스메이킹과 결합하되, 표면적인 복각보다 재단과 물성의 원리를 복원하는 데 우선순위를 둔다.

피촐리의 낭만주의적 색채가 크리스토발의 엄격한 건축적 조형미와 조우하면서, 뎀나 체제하에 가려져 있던 오트 쿠튀르 본연의 테크니컬한 가치가 다시금 하우스의 심장부로 복귀했다.

다양해진 쿠튀르 캐스팅

2019 S/S 오트 쿠튀르는 글로벌 하이 패션계의 런웨이 지형도를 바꾼 촉매제였다. 다양한 인종을 단순한 '구색 맞추기(Tokenism)' 용도로 소비하지 않고, 컬렉션의 주축 서사로 전면 배치했다. 이는 콧대 높은 럭셔리 하우스들이 쿠튀르와 글로벌 캠페인에서 인종과 연령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한 거대한 시대적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수상·전시 이력

발렌티노 단독 디렉터로 활동하던 2018년, 영국 패션 협회(BFC) 주관 패션 어워드에서 '올해의 디자이너(Designer of the Year)'를 수상했다. 2022년 동 어워드에서 다시 한번 트로피를 거머쥐며 그의 색채 마법과 쿠튀르 공력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

2022년 카타르 도하의 복합 디자인 센터 M7에서 개최된 대규모 전시 《포에버 발렌티노(Forever Valentino)》는 창립기부터 피촐리 시대까지 이어지는 오트 쿠튀르와 레디 투 웨어의 방대한 아카이브를 엮어냈다. 피촐리는 스타 큐레이터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와 함께 전시 기획에 직접 참여했다.

'핑크 PP'는 2022년 ⟪GQ⟫ 패션 어워드에서 ‘올해의 색’으로 선정되었다. 런웨이에서 파생된 단일 셰이드(Shade)가 레드카펫, 리테일, 뷰티, 대중문화 전반의 메가 트렌드로 폭발적으로 바이럴된 파급력을 인정받은 결과다.

반응과 평가

현재의 위상

2026년 기준 발렌시아가의 레디 투 웨어와 오트 쿠튀르 부문을 총괄하고 있다. 발렌티노에서 25년간 액세서리 헤드, 공동 디렉터, 단독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거치며 한 시대를 풍미한 후, 새로운 역사적 하우스에서 치르는 커리어의 첫 전환점이다.

전 직장에서 남긴 락스터드 라인과 핑크 PP는 디렉터가 교체된 현재까지도 발렌티노를 견인하는 핵심 수익원이자 시각적 코드로 건재하다.

발렌시아가에서는 데뷔 쇼를 기점으로 뎀나 시대와의 명확한 선 긋기에 나섰다. 하입(Hype)을 유도하는 로고와 스트리트웨어의 비중을 대폭 덜어내고, 건축적 재단, 깃털 같은 볼륨, 아틀리에 발(發) 신소재를 하우스의 새로운 언어로 정립했다.

디자인 반응

우호적인 평단은 그가 극단적으로 거대한 드레스와 강렬한 원색을 쏟아내면서도 옷이 착용자를 압도하지 않게 튜닝하는 밸런스 감각을 높이 산다. 신체와 직물 사이에 여백을 두어 체형의 단점을 우아하게 은폐하고, 다양한 인종과 성별이 젠더의 장벽 없이 낭만주의를 공유할 수 있게 만든 공로를 칭송한다.

반면, 맥시 드레스, 케이프, 리본, 플로럴, 깃털 등 안전하고 서정적인 모티프가 시즌마다 자가 복제되며 컬러와 장식에만 과도하게 의존한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레드카펫 스포트라이트와 화보에서는 압도적이지만, 리얼웨이 기반의 기성복과 남성복 씬에서는 런웨이만큼의 설득력과 에지(Edge)를 발휘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꼽힌다.

발렌시아가 합류에 대해서는 뎀나 체제의 도발적 피로감을 걷어내고 크리스토발의 정통 테일러링으로 우아하게 회귀했다는 호평이 주를 이뤘다. 다만 첫 컬렉션이 방대한 아카이브에 짓눌려 피촐리 본연의 파괴력 있는 넥스트 스텝을 제시하기엔 다소 조심스러웠다는 유보적 반응도 있었다. 이어 발표된 55번째 오트 쿠튀르에서 첨단 내부 설계와 신소재 실험을 전면에 내세우며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켰다는 평을 얻었다.

비판

발렌티노 시절 다양성과 포용적인 캐스팅을 철학으로 주창했으나, 쿠튀르 피스의 천문학적인 가격표와 최상위 VVIP 위주의 고객 생태계는 여전히 견고한 계급적 성벽을 유지했다. 런웨이에 다채로운 인종을 세우는 시각적 진보가, 실제 리테일의 사이즈 포용성이나 진입 장벽 완화로까지 진정성 있게 이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냉소적인 시각이 뒤따른다.

'핑크 PP' 역시 하우스의 아이덴티티를 쇄신한 성공적인 마케팅이었으나, 단일 색상이 글로벌 캠페인과 셀러브리티 룩에 과잉 노출되며 심각한 시각적 피로도를 유발했다. 색채 자체가 밈(Meme)처럼 소비되는 바람에, 그 이면에 담긴 장인들의 숭고한 쿠튀르적 공정은 가벼운 바이럴 이미지 뒤로 휘발되고 말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현재 발렌시아가 체제에서는 크리스토발의 유산을 지나치게 경건하게 대우하는 태도가 역으로 하우스의 역동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리스크를 안고 있다. 과거의 조형적 실루엣을 하이테크 소재로 정교하게 복원하는 작업만으로는, 전임자 뎀나가 럭셔리 씬 전체를 뒤흔들었던 거대한 문화적 파급력과 커머셜 파워를 완전히 대체하기 역부족이다. 피촐리 고유의 낭만적 색채 미학과 발렌시아가의 금욕적인 테일러링을 장기적으로 어떻게 융합하고 갱신해 나갈 것인지가 그에게 남겨진 가장 날카로운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