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Maria Grazia Chiuri)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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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roline Tompkins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Maria Grazia Chiuri)는 펜디 액세서리 팀에서 경력을 시작해 발렌티노와 디올을 거쳐 다시 펜디로 화려하게 복귀한 이탈리아 로마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다. 발렌티노 시절 피에르파올로 피촐리와 함께 '락스터드' 열풍을 주도하며 브랜드 체질을 개선했고, 2016년 디올 역사상 최초의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부임해 페미니즘 담론을 럭셔리 패션의 중심부로 끌어올렸다. 2025년 10월부터는 펜디의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CCO)로서 남녀 기성복 및 오트 쿠튀르 전 부문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치우리의 디자인은 의복을 인위적으로 해체하거나 신체를 속박하기보다, 착용자의 실제 움직임과 실용성을 최우선에 둔다. 바 재킷, 튈 스커트, 발레 플랫과 전투화 등 익숙하고 편안한 요소들을 현실적인 옷장 안에 직조해 낸다. 슬로건 티셔츠와 거대한 런웨이 설치물을 통해 여성주의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선언하며, 이를 통해 럭셔리 하우스의 상업적 볼륨을 폭발적으로 팽창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페미니즘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의제를 고가의 로고 상품으로 납작하게 소비시켰다는 매서운 비판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약력·연혁

1964년 로마에서 태어난 치우리는 어머니의 드레스 공방을 지켜보며 성장했고, 로마 유럽디자인학교(IED) 졸업 후 1989년 펜디 액세서리 팀에 합류했다. 창립 가문의 다섯 자매가 이끌던 펜디에서 가죽과 금속 부자재의 결합을 연구하며 '바게트 백' 개발 등 하우스의 황금기에 일조했다. 1999년 오랜 파트너인 피에르파올로 피촐리와 함께 발렌티노로 이적한 그녀는, 2008년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승격하며 레드카펫 위주의 브랜드를 '락스터드' 중심의 젊고 상업적인 럭셔리 하우스로 완벽하게 탈바꿈시켰다.

2016년, 70년 디올 역사상 최초의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전격 취임했다. 데뷔 쇼부터 펜싱 재킷과 “We Should All Be Feminists” 슬로건 티셔츠를 무대에 올리며, 여성의 몸을 시각적 이상향에 가두지 않고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는 주어로 묘사했다. 약 9년간 북 토트, 새들 백 등 압도적인 커머셜 히트작을 쏟아내며 디올의 르네상스를 이끌었으나, 고향 로마에서 열린 2026 크루즈 컬렉션을 끝으로 하우스와 작별했다.

2025년 10월, 펜디의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CCO)로 선임되며 약 27년 만에 친정으로 귀환했다. 펜디 역사상 최초로 여성복, 남성복, 오트 쿠튀르를 단독 총괄하게 된 그녀는, 2026 F/W 기성복과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연달아 선보이며 가죽과 퍼, 남녀 아틀리에를 하나의 통합된 비전으로 묶어내는 거대한 리뉴얼 작업을 지휘하고 있다.

디자인 철학·언어

구두에서 출발하는 실용적 옷장

여성의 실루엣을 하나의 고정된 드레스 폼에 가두지 않는다. 화려한 튈 스커트에 투박한 전투화를 매치하고, 레이스 이브닝드레스에 납작한 플랫 샌들을 신겨 일상적인 기동성을 부여한다. 디올 바 재킷의 허리선을 부드럽게 완화하거나 실용적인 포켓을 추가하는 등, 인위적인 인체 조각보다 자유로운 활동성을 디자인의 척도로 삼는다.

로맨티시즘과 전술적 무장의 결합

치우리의 로맨티시즘은 결코 유약하지 않다. 가벼운 쉬폰 드레스 위에 승마 부츠와 두꺼운 가죽 벨트를 두르고, 섬세한 레이스 자수 사이에 날카로운 금속 스터드(락스터드)를 박아 넣는다. 디올 데뷔 쇼에서 선보인 펜싱 재킷처럼 여성의 연약함과 전사적 방어력을 한 착장 안에 교차시키며, 팽팽한 시각적 대비를 만들어낸다.

패션의 직설적 선언과 슬로건 매체화

패션을 사회적 담론의 적극적인 매개체로 활용하며, 메시지를 은유하지 않고 직설적인 텍스트로 인쇄한다. “We Should All Be Feminists” 같은 문장을 티셔츠 앞판과 런웨이 세트에 대형으로 전시하여 쇼의 주제를 대중에게 즉각적으로 각인시킨다. 복잡한 미학적 해석을 거치지 않고도 누구나 브랜드를 지적으로 소비하게 만드는 탁월한 대중적 화법이다.

여성 예술가 및 공예 장인과의 연대

여성 예술가들의 작업을 단순한 프린트 모티프로 소모하지 않는다. 주디 시카고, 클레어 퐁텐 등과 런웨이 세트를 공동 기획하고, 스코틀랜드, 멕시코, 인도 등 각국의 지역 수공예 장인들과 텍스타일을 협업한다. 펜디 복귀 당시 내건 “Less I, More Us”라는 슬로건처럼, 단독 디자이너의 천재성보다 공동체의 연대와 다원적 저작권을 런웨이 중심으로 이끌어낸다.

주요 디자인

펜디 2026 F/W 오트 쿠튀르

치우리의 펜디 쿠튀르 데뷔작. 1985년 카를 라거펠트 전시가 열렸던 로마 국립현대미술관을 무대로 삼아 하우스의 유산을 기렸다. 라거펠트 시대의 과장된 어깨 대신, 유연한 카프탄과 하이 웨이스트 팬츠 등 착용자 중심의 실루엣을 제안했다. 특히 가죽과 퍼를 레이스처럼 정교하게 세공한 플로럴 클로크를 통해, 권위적인 소재를 유연하게 치환하는 본인만의 공예적 방향성을 선언했다.

펜디 2026 F/W RTW

친정 펜디로의 복귀를 공식화한 첫 기성복 컬렉션이다. “Less I, More Us”라는 문구 아래 여성과 남성 모델이 함께 런웨이를 걸었다. 테일러드 코트와 레이스 슬립 사이로 다채로운 염색 퍼 재킷을 교차시켰으며, 오랜 기간 축소되었던 펜디의 퍼(Fur) 라인을 빈티지 리폼 프로젝트와 연계하여 다시 전면에 등장시켰다.

디올 북 토트

디올 북 토트(Dior Book Tote, 2018)는 납작하고 네모난 형태의 캔버스 오픈 토트백이다. 전면 중앙에 브랜드 로고를 거대하게 배치하고 오블리크 패턴 등 정교한 자수를 촘촘히 덮은 것이 특징이다. 형태는 극도로 단순하지만 막강한 수납력과 커스터마이징 서비스를 무기로, 런웨이를 넘어 일상과 여행지를 장악한 디올 최고의 커머셜 히트작이다.

디올 2020 S/S 오트 쿠튀르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주디 시카고와 협업해 거대한 여성의 신체 형태 파빌리온에서 진행한 컬렉션이다. 고대 로마식 페플로스(Peplos)를 모티프로, 인체를 압박하지 않는 골드 패브릭과 쉬폰 드레이핑을 선보였다. “여성이 세상을 지배한다면?”이라는 질문을 자수로 새기며, 치우리 체제 디올의 페미니즘 메시지가 가장 직관적이고 웅장하게 결속된 쇼다.

디올 2017 S/S RTW

치우리의 역사적인 디올 데뷔 런웨이. 펜싱 보호복을 바 재킷의 형태로 다듬고 튈 스커트를 매치했으며, “We Should All Be Feminists” 로고 티셔츠를 전 세계에 유행시켰다. 실루엣의 혁신보다는 명징한 슬로건과 캐주얼한 아이템의 믹스 매치를 통해 디올을 완전히 새로운 세대의 상업적 아이콘으로 돌려세운 분기점이다.

발렌티노 락스터드

발렌티노 락스터드(Valentino Rockstud, 2010)는 피라미드 형태의 메탈 스터드를 백, 슈즈, 브레이슬릿 가장자리에 정렬한 액세서리 라인이다. 피촐리와 공동으로 고안한 이 컬렉션은 펑크의 반항적인 디테일을 로마 건축물처럼 정제된 규격으로 다듬어냈다. 우아한 발렌티노의 드레스와 강렬하게 충돌하며 브랜드를 대중적 궤도에 올린 상징적 아이템이다.

디자이너·디자인 조직

펜디 자매들의 협업 유산

커리어 초창기, 펜디 가문의 다섯 자매가 디자인과 경영을 철저히 분업하며 하우스를 이끄는 시스템을 지켜봤다. 개인의 스타성보다 아틀리에 팀워크가 거대 하우스를 굴러가게 하는 동력임을 체득했으며, 이는 훗날 펜디 CCO 귀환 시 남녀복 및 각 소재 부서를 단일한 비전으로 통합하는 리더십의 토대가 되었다.

피에르파올로 피촐리와의 파트너십

펜디와 발렌티노에서 20년 이상 듀오로 활동한 피에르파올로 피촐리는 그녀의 핵심 조력자이자 대비되는 거울이었다. 공동 디렉터 분리 이후, 피촐리가 볼륨과 색채를 통한 로맨티시즘의 확장에 몰두했다면, 치우리는 텍스트 메시지와 실용적인 여성 연대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같은 토대에서 출발해 여성성을 해석하는 두 거장의 확연한 시각차를 남겼다.

여성 예술가 및 공예 공동체와의 연대

문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아티스트 주디 시카고 등 여성 지식인들의 사상을 런웨이의 구조적 뼈대로 삼는다. 세계 각지의 로컬 직조 및 자수 장인들의 노동을 크루즈 컬렉션 캠페인의 중심에 세우며, 패션쇼를 단순한 의복 전시가 아닌 페미니즘과 지역 공예를 후원하는 사회적 플랫폼으로 치환하는 영리한 기획력을 발휘한다.

수상·전시 이력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2015년 CFDA 어워드에서 피촐리와 함께 인터내셔널 어워드를 공동 수상하며 발렌티노의 상업적 르네상스를 공인받았다. 2017년 브리티시 패션 어워드 스와로브스키 포지티브 체인지상 수상에 이어, 2019년 패션계에 미친 문화적 영향력을 인정받아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를 수훈했다.

2021년에는 33명의 여성 사진작가가 디올의 비주얼을 포착한 도서 《허 디올(Her Dior)》을 출간했으며, 2023년 파리 라 갤러리 디올 특별전을 통해 그간 협업해 온 여성 예술가들의 설치 미술과 컬렉션 피스를 하우스 아카이브로 집대성했다. 2024년 니먼 마커스 공로상까지 수상하며 럭셔리 패션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선구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반응과 평가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발렌티노의 젊은 부흥을 이끌고 디올 역사상 최초의 여성 디렉터로 군림한 뒤, 2026년 현재 펜디 전 부문을 총괄하는 수장으로 귀환한 현대 패션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오트 쿠튀르 하우스 특유의 무겁고 숨 막히는 의상을 플랫 슈즈, 포켓이 달린 재킷, 가벼운 튈 스커트 등 여성의 실제 일상을 위한 직관적이고 실용적인 룩으로 치환하는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을 지녔다. '락스터드'와 '북 토트' 등 브랜드를 먹여 살리는 압도적인 메가 히트 액세서리를 고안하는 동물적인 상업적 본능은 패션계 내에서 독보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적 성공 이면에는 디자인의 동어반복과 자기 복제라는 매서운 비판이 상존한다. 매 시즌 페미니즘 메시지나 공예 모티프의 명분만 바뀔 뿐, 레터링 티셔츠, 튈 스커트, 투박한 부츠로 귀결되는 착장의 공식이 수년간 판에 박힌 듯 반복된다는 지적이다. 하이엔드 패션 본연의 구조적 혁신이나 실루엣의 발전보다는 유명 예술가와의 협업이나 거대한 세트 디자인이라는 외부의 포장재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는 아쉬움이 뒤따른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을 고가의 럭셔리 상품으로 납작하게 마케팅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저항적이고 정치적인 구호가 수십만 원짜리 면 티셔츠로 전락하며 그 본질이 희석되었다는 것이다. 펜디 복귀 직후 모피(Fur)를 컬렉션 전면에 다시 내세운 행보 역시 치우리가 그간 주창해 온 지속가능성과 생태주의 철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싸늘한 여론을 마주하고 있다. 디올에서 보여준 확고한 커머셜 성과를 넘어, 펜디라는 친정 무대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형태적'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증명해 낼 것인지가 이 노련한 수장의 마지막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