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반 데어 로에 (Ludwig Mies van der Rohe)
개요
<img src="https://d2xsxph8kpxj0f.cloudfront.net/310519663429662740/ffcjRzrXsTCDKgX6s8aDwC/articles/1784104813010-fbe5f26b2163f7ce.webp" alt="Ludwig Mies van der Rohe" data-orientation="original" data-original-src="https://d2xsxph8kpxj0f.cloudfront.net/310519663429662740/ffcjRzrXsTCDKgX6s8aDwC/articles/1784104814583-ed9554ab1f1775b1.webp" width="600" />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1886년 3월 27일~1969년 8월 17일)는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건축가이자 교육자다. 본명은 마리아 루트비히 미하엘 미스(Maria Ludwig Michael Mies)이며, 1920년대부터 어머니의 성 로에(Rohe)를 붙인 지금의 이름을 사용했다.
미스는 가느다란 기둥으로 지붕과 바닥을 지지하고, 구조와 분리된 벽으로 내부를 느슨하게 나누는 방식을 발전시켰다. 벽이 건물을 떠받치는 역할에서 벗어나자 내부 공간은 한 방향에 고정되지 않고 넓고 연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는 철과 유리, 벽돌, 대리석처럼 성격이 다른 재료를 정교하게 맞추면서도 형태의 수는 최소한으로 줄였다. “적을수록 풍부하다(Less is more)”와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라는 문장은 요소를 줄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남은 재료와 접합부를 끝까지 정교하게 다룬 그의 태도를 압축한다.
유럽에서는 바이센호프 주거단지와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빌라 투겐트하르트를 설계하고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을 맡았다.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는 일리노이공과대학교 캠퍼스와 판스워스 하우스, 레이크쇼어 드라이브 아파트, 크라운 홀, 시그램 빌딩을 통해 철골과 유리로 만든 교육시설·주택·초고층 건물의 기준을 세웠다.
미스의 단순함은 요소를 무작정 덜어내는 방식이 아니었다. 기둥의 위치와 벽의 끝, 석재의 무늬, 금속과 유리가 맞닿는 틈까지 세밀하게 조정해 남은 요소가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했다. 이 정교한 문법은 전 세계 도시로 퍼졌지만, 값싼 복제품이 늘어나면서 획일적인 유리 상자의 원형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약력·연혁
아헨의 석공 작업과 베를린 진출
미스는 1886년 독일 아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하엘 미스는 석공이자 석재 사업자였고, 미스는 어린 시절 작업장에서 돌을 고르고 자르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봤다. 정규 건축학교에 진학하지 않았으며, 건설 현장과 도면 작업을 거치며 설계를 배웠다.
1905년 베를린으로 옮겨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인 브루노 파울의 사무소에서 일했다. 이 시기에 철학자 알로이스 릴을 위한 주택을 설계하며 첫 독립 작업을 완성했다.
1908년에는 페터 베렌스 사무소에 들어갔다. 베렌스는 당시 AEG의 공장과 제품, 그래픽을 함께 설계하고 있었고, 미스는 대형 건축의 구조와 산업 생산, 고전 건축의 비례를 현대 건축에 적용하는 과정을 접했다.
고전주의 주택과 전쟁기
미스는 1912년 독립 사무소를 열고 베를린 교외의 주택을 중심으로 작업했다. 초기 주택은 경사지붕과 대칭적인 입면, 벽돌과 석재를 사용해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과 독일 신고전주의의 영향을 드러냈다.
1913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크뢸러뮐러 부부를 위한 주택 설계안을 준비했다.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네덜란드 건축가 헨드릭 페트뤼스 베를라헤의 벽돌 건축을 접하는 계기가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에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부유층의 전통적인 저택을 설계하던 초기 작업에서 벗어나 철과 유리, 콘크리트가 만드는 새로운 건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미완성 계획과 근대건축 운동
1921년 미스는 베를린 프리드리히슈트라세 고층건물 공모에 유리로 감싼 삼각형 마천루를 제안했다. 계획은 선정되지 않았지만 역사 장식과 두꺼운 석조 외벽에서 벗어난 유리 초고층 건물의 가능성을 강한 이미지로 보여줬다.
이후 유리 마천루와 철근콘크리트 업무건물, 콘크리트 전원주택, 벽돌 전원주택 계획을 잇달아 발표했다. 대부분 지어지지 않았지만 투시도와 모형, 전시를 통해 자신의 공간 개념을 알렸다.
미스는 노벰버그루페와 건축가 모임 데어 링에 참여했고, 전위 잡지 《G》의 편집에도 관여했다. 새로운 건축은 과거 양식을 다시 쓰는 데서 나오지 않고, 당대의 구조와 재료, 생활 방식에서 나와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공작연맹과 릴리 라이히
1926년 미스는 독일공작연맹의 부회장을 맡았다. 이듬해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건축전 《주거》의 예술감독으로 바이센호프 주거단지의 전체 배치와 참여 건축가 선정을 이끌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디자이너 릴리 라이히와 긴밀하게 협업했다. 두 사람은 전시 공간과 가구, 직물, 유리, 색채, 실내 배치를 함께 다뤘고, 1927년 슈투트가르트 전시와 1929년 바르셀로나 국제박람회, 빌라 투겐트하르트 작업으로 협업을 이어갔다.
미스는 구조와 공간의 큰 틀을 맡았고, 라이히는 재료와 직물, 가구, 전시 동선을 구체화했다. 두 사람이 함께한 전시와 실내는 건축과 인테리어, 제품을 하나의 환경으로 연결했다.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
1930년 미스는 발터 그로피우스의 중재로 하네스 마이어의 뒤를 이어 바우하우스의 세 번째 교장이 됐다. 학교의 정치 활동을 제한하고 건축 중심의 전문 교육을 강화했으며, 공방과 산업디자인의 비중은 이전보다 줄였다.
1932년 데사우시가 학교를 폐쇄하자 베를린의 폐공장을 빌려 사립학교로 다시 열었다. 이듬해 게슈타포가 학교를 수색한 뒤 운영을 재개하려면 교사진과 교육 내용을 정권의 기준에 맞추라고 요구했다.
미스와 교사진은 1933년 7월 학교를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바우하우스의 이름을 국가사회주의 문화정책 아래 유지하기보다 문을 닫는 쪽을 택한 것이다.
미스는 학교 폐쇄 뒤에도 독일에 남아 제국은행 공모를 비롯한 국가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갈 가능성을 찾았다. 그러나 근대건축이 나치 체제의 공식 건축에서 밀려나면서 대형 의뢰를 얻지 못했다.
미국 이주와 일리노이공과대학교
미스는 1937년 미국을 처음 방문했고, 1938년 시카고의 아머공과대학 건축학과 책임자로 부임하며 미국에 정착했다. 학교가 일리노이공과대학교로 개편된 뒤에도 1958년까지 건축 교육을 이끌었다.
그는 고전 양식을 모사하던 교육 대신 벽돌과 목재, 철골의 성질을 단계적으로 익히게 했다. 학생은 작은 벽과 방을 설계하는 데서 시작해 건물과 캠퍼스, 도시로 작업 규모를 넓혀갔다.
학교는 미스에게 캠퍼스 마스터플랜도 맡겼다. 그는 기존 도시 블록 위에 일정한 모듈을 적용하고 철골과 벽돌, 유리로 구성한 낮은 건물을 배치했다. 캠퍼스는 미스의 교육과 건축 원리가 같은 장소에서 작동하는 실험장이 됐다.
미스는 1944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미국의 철강 산업과 커튼월 기술, 대형 부동산 개발을 바탕으로 유럽에서 도면으로 제시했던 건축을 실제 규모로 옮기기 시작했다.
초고층 건물과 후기 작업
1940년대 후반부터 미스는 공동주택과 교육시설, 업무용 고층건물을 잇달아 설계했다. 판스워스 하우스에서는 바닥과 지붕, 유리벽만 남긴 주택을 만들었고, 레이크쇼어 드라이브 아파트에서는 반복되는 철골과 유리 외관으로 고층 공동주택의 기준을 제시했다.
1956년 완공된 크라운 홀에서는 내부 기둥이 없는 넓은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1958년 시그램 빌딩에서는 초고층 건물을 대지 경계에서 뒤로 물려 광장을 두고, 청동과 유리로 외관의 비례와 접합을 세밀하게 다듬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디트로이트 라파예트 파크와 시카고 연방센터 같은 대규모 도시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건물 한 채의 구조와 외피를 넘어 여러 동과 광장, 보행 공간을 하나의 질서로 묶었다.
1962년에는 서베를린의 20세기 미술관 설계를 의뢰받았다. 1968년 문을 연 신국립미술관은 미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 완공한 유일한 건물이자, 혼자 설계한 마지막 완공작이 됐다.
미스는 1969년 8월 17일 시카고에서 세상을 떠났다. 도면과 모형, 사진, 가구, 사무소 기록은 뉴욕 현대미술관의 미스 반 데어 로에 아카이브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 보존돼 있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기둥과 벽의 분리
미스는 건물을 받치는 기둥과 공간을 나누는 벽을 분리했다. 기둥은 지붕과 바닥의 하중을 받고, 벽은 구조와 상관없이 필요한 위치에 놓였다.
벽은 방을 완전히 닫는 경계보다 시선을 돌리고 이동을 유도하는 면으로 사용됐다. 벽 끝을 외벽이나 천장에 모두 붙이지 않으면 공간은 그 뒤로 계속 이어지고, 서로 다른 영역도 하나의 큰 실내 안에 놓일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과 빌라 투겐트하르트에서는 대리석과 목재 벽이 지붕을 받치지 않는다. 독립된 벽이 식사와 휴식, 이동 공간을 나누면서도 시야와 동선은 끊지 않는다.
미스의 열린 평면은 단순히 벽을 줄인 빈 공간이 아니다. 기둥과 벽, 가구의 위치를 세밀하게 정해 사람이 걷고 머무는 장소를 만들었다.
보편 공간
미스는 특정한 용도에 맞춰 내부 벽을 고정하기보다 여러 활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큰 공간을 만들려 했다. 이를 보편 공간 또는 유니버설 스페이스라고 부른다.
지붕을 외곽 기둥이나 큰 보로 받치면 내부 기둥과 벽을 줄일 수 있다. 남은 공간은 낮은 칸막이와 가구, 커튼으로 나눠 수업과 전시, 업무, 행사를 수용한다.
크라운 홀은 하나의 넓은 실내에서 여러 스튜디오 수업을 동시에 진행하도록 설계됐다. 신국립미술관의 상부 홀도 작품과 행사의 성격에 따라 구성을 바꿀 수 있도록 비워뒀다.
보편 공간은 변화에 대응하기 쉽지만 음향과 사생활, 수납, 설비처럼 용도마다 필요한 조건을 해결하기 어렵다. 넓게 비운 공간이 실제로 잘 작동하려면 가구와 칸막이, 운영 방식이 함께 준비돼야 한다.
구조를 드러내는 질서
미스의 건축에서는 기둥과 보, 창틀, 외장 패널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다. 구조와 외피의 선이 건물 전체를 하나의 격자로 묶으며, 작은 접합부도 전체 비례에 맞춰 정리된다.
그는 실제 구조를 그대로 노출하는 데만 집착하지 않았다. 철골을 내화재와 외장 안에 감춰야 할 때는 외부에 금속 부재를 덧대 구조의 위치와 리듬을 표현했다. 레이크쇼어 드라이브 아파트와 시그램 빌딩의 외부 I형 부재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미스의 외관은 구조를 그대로 복사한 것이 아닌, 건물이 어떻게 서 있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실제 구조를 시각적인 질서로 다시 정리한 결과다.
이 방식은 건물에 강한 일관성을 주지만, 하중을 받지 않는 부재를 구조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구조의 정직성’을 둘러싼 논쟁도 남겼다.
재료의 대비와 정밀한 접합
미스는 형태를 줄이는 대신 재료의 무늬와 반사, 촉감이 더 선명하게 나타나도록 했다. 강철과 유리 옆에 대리석과 오닉스, 고급 목재, 가죽, 직물을 배치해 차갑고 균일한 표면과 따뜻하고 불규칙한 표면을 대비시켰다.
석재는 넓은 판으로 잘라 무늬가 하나의 그림처럼 이어지게 배치했다. 유리는 공간을 막으면서도 바깥을 보여주고, 빛과 주변 풍경을 반사했다. 금속은 가는 선으로 구조와 가구의 윤곽을 잡았다.
재료가 만나는 지점에는 두께와 틈을 세밀하게 조정했다. 기둥이 바닥에 닿는 부분과 유리와 금속 프레임 사이의 간격, 벽 끝의 마감은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공간 전체의 정돈된 인상을 좌우한다.
미스의 단순함이 높은 제작비를 요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장식으로 오차를 가리지 않기 때문에 작은 접합부와 표면의 상태까지 정확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드와 비례
미스는 건물의 기둥과 벽, 창, 천장, 바닥 줄눈을 공통된 그리드에 맞췄다. 하나의 기준 치수를 반복하면 서로 다른 부품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리노이공과대학교 캠퍼스에서는 24피트 모듈을 건물과 외부 공간에 적용했다. 기둥 간격과 벽돌 치수, 창과 출입구가 같은 기준 안에서 움직여 여러 건물이 하나의 캠퍼스로 보이게 했다.
그리드는 설계와 시공을 정리하는 도구이면서 공간의 질서를 눈에 보이게 하는 장치였다. 일정한 간격을 반복하되 출입구와 중정, 광장처럼 중요한 지점에서는 비우거나 흐름을 끊어 변화를 줬다.
미스의 건축이 단순한 상자처럼 보이면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 이유는 반복되는 그리드와 예외가 함께 놓이기 때문이다.
개방과 경계
미스의 유리 건축은 실내와 외부를 완전히 합치지 않는다. 유리는 풍경을 보여주지만 비와 바람을 막고, 빛의 방향에 따라 내부를 드러내거나 주변을 거울처럼 반사한다.
판스워스 하우스에서는 유리 외벽을 통해 숲과 강이 실내를 둘러싼다. 그러나 욕실과 설비는 중앙의 목재 코어 안에 숨겼고, 바닥과 지붕은 자연에서 분리된 수평판으로 떠 있다.
빌라 투겐트하르트에서는 정원 쪽 유리창 일부가 바닥 아래로 내려가 실내와 테라스를 직접 연결한다. 반대로 오닉스 벽과 곡면 목재 벽은 넓은 거실 안에 서로 다른 머무름의 장소를 만든다.
미스가 만든 개방성은 모든 경계를 없애는 방식이 아니다. 투명한 면과 불투명한 벽, 열린 공간과 닫힌 코어를 나란히 두어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감출지 조절했다.
가구와 공간
미스와 릴리 라이히는 가구를 건축이 끝난 뒤 채워 넣는 물건으로만 보지 않았다. 의자와 테이블, 커튼, 카펫이 넓은 공간 안에서 사람의 위치와 이동을 정하도록 배치했다.
강관 의자는 가는 금속 프레임이 하중을 받고, 가죽과 직물이 몸에 닿는 부분을 맡는다. 건축에서 구조와 벽을 분리한 원리가 가구에서는 프레임과 좌판의 분리로 나타났다.
MR 체어와 바르셀로나 체어, 브르노 체어, 투겐트하르트 체어는 전시와 주택의 재료, 공간에 맞춰 개발됐다. 현재는 독립된 가구 클래식으로 유통되지만 처음에는 특정 건축과 실내를 구성하던 요소였다.
가구의 공식 저작권 표기는 제품마다 다르지만, 최근 연구는 이 시기 가구와 전시를 미스 한 사람의 작업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라이히와의 협업 환경 속에서 다룬다.
주요 작업
프리드리히슈트라세 고층건물 계획
프리드리히슈트라세 고층건물 계획(Friedrichstrasse Skyscraper Project, 1921)은 베를린 도심의 삼각형 대지에 제안한 유리 초고층 건물이다. 철골 구조를 유리 외피로 감싸고 여러 방향으로 꺾인 평면이 주변 도시와 하늘을 반사하도록 했다.
미스는 유리 모형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하며 투명한 면이 빛을 통과시키고 주변을 비추는 방식을 시험했다. 건물의 입면을 장식으로 나누기보다 구조와 유리의 반복으로 정리했다.
당시 기술과 경제 조건으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석조 외벽과 역사 장식에서 벗어난 유리 마천루를 강한 이미지로 제시하며 이후 고층 업무건축의 방향을 앞서 보여줬다.
벽돌 전원주택 계획
벽돌 전원주택 계획(Brick Country House Project, 1923~1924)은 서로 다른 길이의 벽돌 벽이 실내에서 정원으로 뻗어나가는 미완성 주택 계획이다.
닫힌 직사각형 방을 차례로 배치하는 대신 벽이 서로 어긋나며 식사와 휴식, 이동 공간을 느슨하게 나눈다. 벽은 건물 외곽에서 멈추지 않고 대지로 이어져 실내와 외부의 경계를 흐린다.
지어지지는 않았지만 독립된 벽으로 공간의 방향과 흐름을 조절하는 방법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도면이다. 이 실험은 바르셀로나 파빌리온과 빌라 투겐트하르트의 열린 평면으로 이어졌다.
바이센호프 공동주택
바이센호프 공동주택(Weissenhof Apartment Building, 1927)은 슈투트가르트 공작연맹 주거단지의 높은 지점에 세운 공동주택이다. 미스는 단지 전체의 배치를 맡는 동시에 긴 4층 건물을 직접 설계했다.
철골 구조를 사용해 내부 칸막이가 하중을 받지 않게 했고, 세대 규모와 입주자의 요구에 따라 평면을 다르게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같은 구조와 외관 안에 여러 주거 유형을 넣은 것이다.
평지붕과 길게 이어진 창, 밝은 외벽은 주거단지 전체의 공통된 인상을 만들었다. 공동주택은 여러 건축가가 설계한 독립 주택을 묶는 배경이자 단지의 기준선을 맡았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바르셀로나 파빌리온(Barcelona Pavilion, 1929)은 미스와 릴리 라이히가 바르셀로나 국제박람회에서 바이마르공화국을 대표하기 위해 설계한 독일관이다.
가느다란 십자형 기둥이 평평한 지붕을 받치고, 녹색 대리석과 트래버틴, 오닉스, 투명·반투명 유리벽이 서로 어긋나며 공간을 나눈다. 벽은 방을 닫지 않고 시선을 돌리며 안과 밖, 수면과 조각을 차례로 보여준다.
트래버틴 바닥은 외부 기단에서 실내로 끊김 없이 이어지고, 수공간은 벽과 지붕, 게오르크 콜베의 조각을 반사한다. 관람객은 정면에서 건물 전체를 보는 대신 벽 사이를 걸으며 재료와 풍경의 관계를 확인한다.
파빌리온은 박람회가 끝난 뒤 철거됐다. 바르셀로나시는 1983년 재건을 위한 재단을 세웠고, 건물은 원래 위치에 1986년 다시 완공됐다.
빌라 투겐트하르트
빌라 투겐트하르트(Villa Tugendhat, 1928~1930)는 체코슬로바키아 브르노의 경사지에 그레테와 프리츠 투겐트하르트 부부를 위해 설계한 주택이다.
거리에서는 낮은 단층 건물처럼 보이지만 정원 쪽으로 세 개 층이 내려간다. 주생활 공간은 정원을 향한 넓은 한 층으로 구성됐으며, 가는 강철 기둥이 하중을 받고 오닉스 벽과 곡면 목재 벽이 식사와 휴식 공간을 나눈다.
정원 쪽 대형 유리창 두 장은 기계장치를 이용해 바닥 아래로 내려간다. 공기 순환과 온도를 조절하는 설비, 전동 차양, 붙박이 가구도 건축과 함께 설계됐다.
값비싼 재료와 당시의 첨단 설비를 사용해 개방 평면을 실제 주거에 적용한 건물이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가구 연작
미스는 1920년대 후반 릴리 라이히와 전시와 실내를 함께 설계하며 강관과 평철, 가죽, 직물을 사용한 의자와 테이블을 개발했다.
MR 체어는 연속된 강관 프레임이 뒷다리 없이 좌판을 받치는 캔틸레버 구조를 사용했다. 바르셀로나 체어는 교차하는 평철 프레임 위에 가죽 쿠션을 올렸고, 브르노 체어와 투겐트하르트 체어도 금속 구조와 몸에 닿는 면을 분리했다.
가는 프레임은 넓은 실내의 시야를 막지 않으면서 사람이 앉을 위치를 정했다. 금속과 가죽, 직물의 대비도 건축에서 사용한 재료 구성과 맞물렸다.
이 가구들은 현재까지 생산되며 20세기 모던 가구의 대표작으로 남아 있다. 다만 라이히의 전시와 재료 연구가 오랫동안 미스의 이름 뒤에 가려졌다는 점은 계속 재검토되고 있다.
일리노이공과대학교 캠퍼스
일리노이공과대학교 캠퍼스(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 Campus, 1939~1958)는 미스가 시카고 남부에 계획한 교육시설 단지다.
기존 도시 블록 위에 24피트 모듈을 적용하고 검은 철골 프레임과 황갈색 벽돌, 넓은 유리창을 사용한 낮은 건물을 배치했다. 용도에 따라 건물의 크기와 출입구는 달랐지만 같은 치수와 재료를 반복해 캠퍼스 전체를 하나의 질서로 묶었다.
미스는 캠퍼스 설계와 건축 교육을 동시에 맡았다. 학생은 그가 설계한 건물 안에서 구조와 재료를 배우고, 창밖의 캠퍼스를 통해 모듈과 배치를 직접 확인했다.
캠퍼스는 근대 건축교육의 대표적인 환경으로 남았지만, 조성 과정에서 기존 시카고 남부의 주거지와 거리망이 철거됐다. 건축적 질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기존 주민과 공동체가 밀려난 도시재개발의 역사도 함께 남아 있다.
판스워스 하우스
판스워스 하우스(Farnsworth House, 1945~1951)는 시카고의 의사 이디스 판스워스를 위해 일리노이주 플라노의 폭스강 인근에 지은 주말주택이다.
여덟 개의 흰색 철골 기둥이 바닥판과 지붕판을 받치고, 외벽은 거의 전부 유리로 구성됐다. 실내 중앙의 목재 코어에는 욕실과 설비, 주방을 모았으며 나머지 공간은 하나로 이어진다.
바닥을 지면에서 들어 올리고 테라스와 계단을 통해 대지로 내려가게 했다. 실내에서는 숲과 강, 계절 변화가 유리벽을 통해 사방으로 보인다.
공사비 증가와 설계 변경을 둘러싸고 미스와 판스워스는 소송을 벌였다. 판스워스는 사생활과 냉난방, 수납, 해충 문제를 지적했고, 미스는 미지급 설계·공사비를 청구했다. 건축적 완성도와 실제 거주가 정면으로 충돌한 사례다.
레이크쇼어 드라이브 아파트
레이크쇼어 드라이브 아파트(860–880 Lake Shore Drive Apartments, 1948~1951)는 시카고 미시간호 인근에 세운 두 동의 철골·유리 공동주택이다.
두 건물은 직각으로 배치돼 서로의 전망을 완전히 막지 않는다. 반복되는 창과 검은 금속 프레임이 외관 전체에 일정한 리듬을 만든다.
실제 철골은 내화재와 외장 안에 감췄고, 외부에는 I형 금속 부재를 덧대 기둥과 층의 위치를 표현했다. 구조와 외관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건물이 서 있는 질서를 한눈에 파악하게 했다.
이 외관 구성은 이후 미국과 세계의 공동주택·업무시설에 빠르게 퍼졌다. 동시에 미스의 정교한 비례와 접합을 생략한 값싼 유리 상자가 대량으로 생기는 출발점이 됐다.
S. R. 크라운 홀
S. R. 크라운 홀(S. R. Crown Hall, 1950~1956)은 일리노이공과대학교 건축대학을 위해 설계한 교육시설이다.
건물 바깥에 세운 여덟 개의 철골 기둥과 네 개의 대형 판형 보가 지붕을 받치면서 주층 내부의 기둥을 없앴다. 약 36.6m와 67m 크기의 실내는 하나의 넓은 공간으로 열려 있다.
낮은 목재 칸막이와 가구가 스튜디오와 강의, 전시 영역을 나누지만 천장까지 닿지는 않는다. 넓은 지붕과 바닥은 끊기지 않고 이어지고, 수업 구성에 따라 칸막이와 책상 배치를 바꿀 수 있다.
검은 철골과 투명·반투명 유리는 구조와 내부 활동을 외부에 드러낸다. 미스가 추구한 보편 공간을 교육시설에 가장 직접적으로 적용한 건물이다.
시그램 빌딩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 1954~1958)은 뉴욕 파크 애비뉴에 세운 주류기업 시그램의 본사다. 미스가 건축을 맡았고 필립 존슨이 실내 설계와 프로젝트 진행에 참여했다.
건물을 대지 경계까지 채우지 않고 거리에서 뒤로 물려 넓은 화강석 광장을 만들었다. 분수와 낮은 단차만 둔 광장은 초고층 건물의 전면을 바라볼 거리를 확보하고 혼잡한 업무지구 안에 열린 공간을 제공했다.
청동색 유리와 금속 프레임, 외부 I형 부재가 수직선을 강조한다. 실제 철골은 내화재 안에 감춰져 있지만 외부 부재가 기둥의 위치와 건물의 높이를 시각적으로 정리한다.
고가의 청동과 석재, 정밀한 시공을 사용한 기업 본사였지만 광장과 건물의 배치는 뉴욕의 고층건물 규정과 전 세계 업무용 타워 설계에 큰 영향을 줬다.
신국립미술관
신국립미술관(Neue Nationalgalerie, 1962~1968)은 서베를린 문화포럼에 세운 20세기 미술관이다. 미스가 독일에 남긴 마지막 완공작이다.
정사각형 철골 지붕은 모서리를 비우고 여덟 개의 외곽 기둥이 받친다. 유리로 둘러싼 상부 홀에는 내부 기둥이 없으며 광장과 도시가 사방으로 보인다.
넓은 상부 홀은 특별전과 행사를 위해 비워두고, 소장품 전시와 수장고, 관리시설은 아래층에 배치했다. 건축을 대표하는 공간과 미술관의 주요 기능을 위아래로 나눈 구성이다.
거대한 지붕과 투명한 홀은 강한 인상을 주지만 벽이 필요한 회화 전시에는 사용하기 까다롭다. 2015년부터 2021년까지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가 외관을 보존하면서 유리와 설비, 안전시설을 교체했고, 미술관은 2021년 다시 문을 열었다.
영향 관계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
미스는 프로이센 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의 명확한 비례와 단순한 덩어리, 건축과 대지의 관계에서 영향을 받았다. 초기 주택의 대칭적인 입면과 석재 사용에서 그 흔적이 나타난다.
근대건축으로 방향을 바꾼 뒤에도 싱켈의 질서를 버리지 않았다. 철골과 유리로 재료는 달라졌지만 기단과 열주, 지붕, 광장을 다루는 방식에는 고전 건축의 절제가 남았다.
시그램 빌딩과 신국립미술관은 산업 재료를 사용한 근대건축이면서도 정면성과 비례를 통해 공공건축의 격식을 유지한다.
페터 베렌스와 베를라헤
페터 베렌스 사무소에서 미스는 산업건축과 대형 프로젝트의 운영, 고전적인 비례를 배웠다. AEG 터빈 공장처럼 공장을 도시의 기념비로 다루는 태도도 접했다.
네덜란드 건축가 헨드릭 페트뤼스 베를라헤에게서는 벽돌 벽의 무게와 구축, 재료의 성격을 감추지 않는 태도를 받아들였다.
베렌스가 건물 전체의 비례와 산업 이미지를 가르쳤다면 베를라헤는 벽과 재료가 공간을 만드는 방식을 보여줬다. 미스는 두 영향을 철골 그리드와 독립된 벽의 결합으로 발전시켰다.
데 스테일과 구성주의
미스의 1920년대 계획은 데 스테일과 러시아 구성주의의 비대칭 구성, 떠 있는 면, 기하학적 추상과 맞닿아 있다. 테오 반 되스버그와 엘 리시츠키를 비롯한 전위 예술가가 회화와 건축의 경계를 흔들던 시기였다.
벽돌 전원주택의 뻗어나가는 벽과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의 어긋난 면은 닫힌 상자보다 독립된 선과 면이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다만 미스는 강한 색과 회화적 구성을 그대로 건축으로 옮기지 않았다. 구조와 재료, 치수와 접합을 세밀하게 다듬으며 추상미술의 구성을 실제 공간으로 바꿨다.
릴리 라이히
릴리 라이히는 1920년대 중반부터 미스와 협업한 전시·실내·가구 디자이너다. 두 사람은 바이센호프 전시와 바르셀로나 국제박람회, 빌라 투겐트하르트, 1931년 베를린 건축전 등을 함께 준비했다.
라이히는 직물과 유리, 가죽, 금속을 공간 안에 배치하고 전시 동선과 가구를 구체화했다. 재료가 넓은 실내를 나누고 사람의 위치를 정하도록 만든 작업은 미스의 공간 개념과 분리하기 어렵다.
미스가 미국으로 떠난 뒤 라이히는 독일에 남아 두 사람의 도면과 자료 일부를 보존했다. 전쟁 중 많은 자료가 사라졌고, 라이히의 역할도 오랫동안 미스의 이름 뒤에 놓였다.
현재 바르셀로나의 미스 반 데어 로에 재단을 비롯한 여러 기관은 파빌리온과 당시 전시를 두 사람의 공동 작업으로 명확히 소개하고 있다.
필립 존슨과 미국 모더니즘
필립 존슨은 1932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현대건축: 국제전》을 통해 미스의 작업을 미국에 널리 알렸다. 이후 미스의 전시와 출판, 미국 정착에도 중요한 연결자가 됐다.
1947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미스의 미국 첫 대규모 회고전을 기획했다. 유럽의 미완성 계획부터 미국의 캠퍼스와 주택을 하나의 건축적 발전 과정으로 정리했다.
시그램 빌딩에서는 실내 설계와 프로젝트 진행을 맡으며 미스와 협업했다. 존슨의 전시와 글은 미스를 국제주의 양식의 대표 건축가로 굳혔지만, 그의 건축을 매끈한 유리 상자라는 외관으로 단순화하는 데도 영향을 줬다.
일리노이공과대학교와 시카고의 제자들
미스는 일리노이공과대학교에서 20년 동안 건축 교육을 이끌었다. 학생에게 자신의 외관을 그대로 따라 하게 하기보다 재료와 구조, 비례, 공간을 단계적으로 검토하도록 가르쳤다.
진 서머스와 마이런 골드스미스, 자크 브라운슨을 비롯한 제자와 협업자는 시카고의 대학과 설계사무소로 퍼졌다. 스키드모어 오윙스 앤드 메릴과 C. F. 머피 어소시에이츠 같은 대형 조직도 미스의 철골 구조와 커튼월, 모듈을 여러 건물로 확장했다.
미스의 가르침은 제2 시카고학파로 불리는 철골·유리 고층건축의 토대가 됐다. 구조와 비례를 충실히 발전시킨 건물도 있었지만 검은 격자와 유리 외관만 복제한 ‘미스풍’ 건물도 빠르게 늘었다.
수상·전시 이력
1932년 국제주의 양식 전시
뉴욕 현대미술관은 1932년 《현대건축: 국제전》에서 미스의 작업을 르 코르뷔지에와 발터 그로피우스, J. J. P. 아우트 등의 건축과 함께 소개했다.
헨리러셀 히치콕과 필립 존슨은 장식이 적은 형태와 열린 평면, 철·유리·콘크리트를 사용하는 건축을 국제주의 양식으로 정리했다.
전시는 미스를 미국 건축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면 사회적 목표와 재료, 공간 실험이 서로 다른 건축가를 하나의 외관 양식으로 묶었다는 비판도 받았다.
뉴욕 현대미술관 회고전과 아카이브
뉴욕 현대미술관은 1947년 필립 존슨의 기획으로 미스의 회고전을 열었다. 미스가 미국에 정착한 뒤 처음 열린 대규모 개인전으로, 유럽과 미국 작업을 하나의 경력으로 소개했다.
미스는 말년에 자신의 도면과 모형, 사진, 사무소 기록을 뉴욕 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미술관은 1968년 이를 바탕으로 미스 반 데어 로에 아카이브를 설립했다.
아카이브에는 미스의 작업뿐 아니라 릴리 라이히와 사무소 구성원이 작성한 도면과 기록도 포함돼 있다. 개인 건축가의 작품 목록을 넘어 여러 사람이 함께 작업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주요 수상
영국왕립건축가협회는 1959년 미스에게 로열 골드 메달을 수여했다. 미국건축가협회는 1960년 AIA 골드 메달을 수여했다.
1963년에는 미국 대통령 자유 메달을 받았다. 독일에서도 공로십자훈장과 예술·학문 분야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이 시기의 수상은 유럽 전위 건축가였던 미스가 미국의 교육과 도시 건축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건축유산과 미스상
빌라 투겐트하르트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은 1986년 재건된 뒤 미스 반 데어 로에 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크라운 홀은 미국 국가역사기념물로 지정됐고, 판스워스 하우스는 미국 내셔널 트러스트가 보존·운영한다. 일리노이공과대학교 캠퍼스의 미스 건축도 대학과 미스 반 데어 로에 협회가 복원과 보존을 이어가고 있다.
1988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유럽건축 미스 반 데어 로에상이 시작됐다. 2001년부터는 유럽연합 현대건축상 미스 반 데어 로에상으로 운영되며 유럽의 주요 현대건축을 격년으로 선정한다.
반응과 평가
위상과 영향
미스는 철골과 유리로 만든 현대 건축의 기본 문법을 가장 정교하게 다듬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기둥과 벽을 분리하고 내부를 열어두는 방식은 주택과 학교, 미술관, 공동주택, 초고층 업무시설에 널리 퍼졌다.
그의 영향은 건물의 외형에만 머물지 않았다. 구조와 외피, 가구, 광장, 실내 동선을 하나의 그리드로 정리하는 방식은 대형 설계사무소와 기업 건축의 표준적인 작업 방식으로 이어졌다.
일리노이공과대학교에서 만든 교육과정은 재료와 구조를 중심으로 설계를 배우는 시카고 건축교육의 기반이 됐다. 유럽과 미국의 주요 건축학교에서도 미스의 도면과 건물이 근대건축의 기본 사례로 다뤄진다.
가구와 건축도 계속 생산·사용된다. 파빌리온과 주택, 미술관은 복원과 재개관을 거쳐 운영되고 있으며, MR 체어와 바르셀로나 체어를 비롯한 가구는 현재까지 판매되고 있다.
디자인 반응
미스의 건축을 긍정적으로 보는 쪽은 적은 요소로 공간과 재료를 선명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기둥과 벽, 가구가 정확한 위치에 놓이고 석재의 무늬와 유리의 반사가 더해지면서 비어 있는 공간에도 긴장감이 생긴다.
철골과 유리의 반복은 건물의 질서를 쉽게 파악하게 하고, 열린 실내는 용도 변화에 대응할 여지를 준다. 차가운 금속과 유리 사이에 나무와 가죽, 돌을 배치해 단순한 산업 건축과 다른 촉감과 무게도 만들었다.
반대쪽에서는 지나치게 정돈된 공간이 차갑고 권위적으로 느껴진다고 본다. 넓은 유리벽과 빈 바닥, 정확하게 정해진 가구 배치는 사용자가 물건을 늘리거나 공간을 바꾸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미스의 건축은 사진에서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가의 재료와 정밀한 시공에 크게 의존한다. 값싼 재료와 평범한 접합으로 외관만 따라 하면 미스가 만든 깊이와 비례는 사라지고 반복적인 유리 상자만 남는다.
비판
미스의 건축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없앨지는 대부분 건축가가 결정한다. 이 강한 통제는 정돈된 공간을 만들지만 사용자의 물건과 장식, 생활 방식이 들어갈 여지를 줄일 수 있다.
판스워스 하우스를 둘러싼 갈등은 이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유리벽은 자연을 사방으로 보여줬지만 사생활과 수납, 냉난방, 해충, 홍수에 취약했다. 건축주가 요구한 생활 조건보다 완성된 형태가 앞섰다는 비판이 나왔다.
신국립미술관도 넓은 유리 홀과 거대한 철골 지붕으로 강한 공간을 만들었지만, 벽과 일정한 조도가 필요한 미술 전시에는 제약이 컸다.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설계한 공간도 실제 프로그램에서는 구체적인 보완을 요구했다.
유리 외피는 자연광과 전망을 제공하지만 여름의 과열과 겨울의 냉기, 눈부심, 높은 냉난방 에너지 사용을 불러올 수 있다. 오늘날에는 원래 외관을 보존하면서 단열과 설비 성능을 높이는 일이 미스 건축 복원의 핵심 과제가 됐다.
미스의 미국식 초고층 건축은 도시를 획일화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시그램 빌딩은 청동과 석재, 광장, 정교한 비례에 막대한 비용을 들였지만 후대 개발업자는 직사각형 타워와 유리 커튼월만 값싸게 복제했다.
로버트 벤투리가 “적을수록 지루하다”라고 반박한 대상도 미스의 걸작 하나보다 도시를 뒤덮은 단조로운 아류에 가까웠다. 다만 복제하기 쉬운 국제 공용어를 만든 미스 역시 그 확산에서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다.
릴리 라이히와 사무소 구성원의 기여가 오랫동안 미스 개인의 업적으로 정리된 점도 비판받는다. 전시와 실내, 직물, 가구를 함께 설계한 라이히의 작업은 공간과 재료를 완성하는 핵심 요소였지만 미스의 이름 뒤에 놓이는 경우가 많았다.
나치 집권 뒤의 행보도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미스는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고 바우하우스를 해산했지만, 곧바로 정권에 맞서 독일을 떠난 것도 아니었다. 제국은행 공모와 국가 전시 계획에 참여하며 새 체제 안에서 건축 활동을 이어갈 가능성을 찾았다.
그의 계획은 나치 지도부의 선택을 받지 못했고, 미스는 결국 미국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그를 정권의 중심 협력자로 보는 것은 과하지만 처음부터 타협을 거부한 저항자로만 설명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일리노이공과대학교 캠퍼스와 라파예트 파크 같은 도시 프로젝트도 기존 도시를 지우고 질서정연한 블록과 녹지를 세웠다. 캠퍼스를 조성하는 과정에서는 시카고 남부의 주민과 거리망이 사라졌고, 라파예트 파크에서도 대규모 철거와 주민 이주가 먼저 이뤄졌다.
미스는 철과 유리로 누구나 따라 쓸 수 있는 건축 문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재료와 비례, 시공과 생활을 끝까지 조정하지 않으면 그 문법은 곧바로 평범한 유리 상자로 무너진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만 아무나 완성할 수 없는 언어라는 점이 미스 건축의 힘이자 가장 오래 남은 모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