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설리번 (Louis Sullivan)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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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헨리 설리번(Louis Henry Sullivan, 1856년 9월 3일~1924년 4월 14일)은 미국 시카고를 중심으로 활동한 건축가다. 철골과 엘리베이터가 고층 사무실 건물을 가능하게 한 시기에, 새로운 건물 유형에 맞는 입면 구성과 비례를 정리했다. 이 공로로 ‘마천루의 아버지’라 불리지만, 고층건물의 구조를 처음 발명한 인물이라기보다 높이와 반복, 용도를 외관에 드러내는 방법을 제시한 건축가에 가깝다.

설리번은 시카고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당크마르 아들러와 함께 오디토리엄 빌딩, 웨인라이트 빌딩, 개런티 빌딩을 설계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조지 그랜트 엘름슬리를 비롯한 후대 건축가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가 1896년 「고층 사무실 건물의 예술적 고찰」에서 쓴 “형태는 언제나 기능을 따른다(form ever follows function)”는 근대 건축과 산업디자인을 대표하는 문장이 됐다. 다만 설리번은 장식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건물의 용도와 구조가 큰 형태를 정하고, 장식도 같은 원리 안에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봤다.

약력·연혁

학교보다 사무소에서 배운 건축

설리번은 1856년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1872년 열여섯 살에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건축 과정에 들어갔지만 1년 만에 학교를 떠났다. 이후 필라델피아의 퍼니스 앤 휴이트 사무소에서 프랭크 퍼니스의 대담한 형태와 장식을 접했다.

1873년에는 시카고로 옮겨 윌리엄 르배런 제니의 사무소에서 일했다. 시카고는 1871년 대화재 이후 도심을 빠르게 재건하고 있었고, 설리번은 철과 강철을 활용한 상업 건축이 늘어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1874년 파리로 건너가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지만 정규 과정을 마치지는 않았다. 이듬해 시카고로 돌아온 뒤 여러 사무소에서 도면과 실내 장식을 맡으며 실무를 이어갔다.

아들러와의 파트너십

설리번은 1879년 건축가이자 기술자였던 당크마르 아들러의 사무소에 들어갔고, 1883년 정식 파트너가 됐다. 두 사람은 1895년까지 아들러 앤 설리번으로 활동했다.

아들러는 구조와 음향, 설비, 공사 운영에 강했고, 설리번은 건물의 전체 형태와 실내, 장식을 주로 이끌었다. 다만 두 사람의 역할은 완전히 나뉘지 않았다. 공연장과 고층건물은 구조, 설비, 공간 구성, 장식이 함께 맞물려야 했고, 사무소의 제도사와 장식 디자이너도 설계 과정에 참여했다.

두 사람은 극장과 회당을 설계하며 이름을 알렸고, 오디토리엄 빌딩 이후 고층 사무실 건물로 작업 범위를 넓혔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1888년 사무소에 합류해 1893년까지 일했고, 조지 그랜트 엘름슬리도 장식과 세부 도면을 맡았다.

고층건물과 시카고 박람회

1880년대 후반부터 1890년대 중반까지 설리번은 새로 등장한 고층 사무실 건물의 형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웨인라이트 빌딩과 개런티 빌딩을 거치며 저층 상업 공간, 반복되는 사무실 층, 건물 상부를 구분하고, 긴 세로선으로 전체 높이를 묶는 방식을 발전시켰다.

1893년 시카고 세계 컬럼비아 박람회에서는 교통관을 설계했다. 설리번은 박람회장을 채운 고전주의 건축이 새로운 산업과 기술에 맞는 미국 건축을 찾기보다 유럽의 역사 양식을 되풀이한다고 비판했다.

같은 해 시작된 금융 공황으로 대형 건축 의뢰가 급감했다. 아들러 앤 설리번도 일감을 잃었고, 두 사람은 1895년 파트너십을 끝냈다.

독립 작업과 말년

설리번은 독립한 뒤 베이어드 콘딕트 빌딩, 게이지 빌딩 파사드, 슐레진저 앤 마이어 백화점 같은 상업 건축을 설계했다. 고층건물의 전체 비례뿐 아니라 보행자가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쇼윈도와 출입구, 저층부 장식을 적극적으로 다뤘다.

대형 의뢰가 줄어든 1900년대 이후에는 미국 중서부 소도시에 은행과 상점, 교회를 설계했다. 1907년부터 1919년까지 완성한 여덟 곳의 은행은 후대에 ‘주얼 박스 은행’으로 묶여 불렸다. 건물 규모는 작아졌지만 외벽과 실내, 유리, 벽화, 조명, 가구를 함께 설계하는 방식은 더 촘촘해졌다.

말년에는 자신의 건축관을 글과 도판으로 정리했다. 자서전 《아이디어의 자서전》과 장식 이론서 《건축 장식 체계》가 1924년 출간됐고, 설리번은 같은 해 4월 14일 시카고에서 세상을 떠났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형태는 언제나 기능을 따른다

설리번에게 기능은 방의 용도나 구조 계산만을 뜻하지 않았다. 건물이 어떤 활동을 받아들이고, 같은 활동이 어떻게 반복되며, 도시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까지 형태를 바꾼다고 봤다.

같은 크기의 사무실이 여러 층 반복된다면 외관도 그 반복을 숨기지 않아야 했다. 상점과 로비가 들어가는 저층부에는 넓은 창과 열린 출입구가 필요했고, 설비가 놓이는 상부는 사무실 층과 다른 구성을 가져야 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문장은 후대에 장식 배제와 단순화의 구호로 축약됐다. 그러나 설리번은 기능에 맞춰 구조를 세운 뒤 장식을 지운 것이 아니다. 장식 역시 건물의 용도와 구조, 재료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층건물의 기능 구분

설리번은 고층 사무실 건물을 세 부분으로 나눴다. 거리와 맞닿은 아래층에는 상점과 로비를 두고, 가운데에는 같은 구조의 사무실을 반복했으며, 꼭대기에는 설비와 마감 공간을 배치했다.

이 구성은 흔히 고전 기둥의 기단, 몸통, 머리에 빗대어 설명된다. 하지만 설리번은 고전 기둥의 형태를 그대로 옮기기보다, 건물 안에서 달라지는 기능을 외관에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아래층과 사무실 층, 건물 상부는 쓰임이 다르기 때문에 창의 크기와 벽의 밀도, 장식의 위치도 달라졌다. 고층건물의 입면은 과거 양식을 층층이 쌓는 방식이 아니라 내부 프로그램을 정리한 결과여야 했다.

높이를 드러내는 입면

설리번은 고층건물을 낮은 건물 여러 개가 포개진 것처럼 만들지 않았다. 창 사이의 세로 피어를 길게 잇고, 창과 스팬드럴을 뒤로 물려 건물 전체가 위로 뻗어 보이게 했다. 반복되는 사무실 층은 하나의 긴 몸통으로 묶었다.

외벽의 세로선은 내부 철골 기둥을 그대로 노출한 것이 아니었다. 설리번은 구조를 복사하기보다 고층건물의 높이와 반복을 도시에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입면을 다시 구성했다.

이 방식은 철골 구조를 감추지 않는다는 원칙보다, 새로운 건물의 성격을 외관에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가까웠다. 설리번은 고층건물이 높다는 사실을 장식으로 가리지 않고, 세로선과 반복되는 창으로 강조했다.

식물의 성장과 장식

설리번의 장식은 줄기와 잎, 씨앗, 꽃봉오리, 소용돌이, 기하학적 격자가 서로 얽힌 형태로 나타난다. 자연물을 사실적으로 베끼기보다 중심에서 선이 갈라지고, 무늬가 회전하며, 작은 단위가 반복되는 성장 방식을 도안으로 바꿨다.

장식은 출입구와 기둥머리, 창 사이 패널, 난간, 처마처럼 구조가 만나거나 끝나는 곳에 집중됐다. 멀리서는 건물의 비례와 세로선이 먼저 보이고, 가까이 다가가면 금속과 테라코타 표면의 무늬가 드러난다.

설리번에게 장식은 평평한 외벽을 채우는 무늬가 아니었다. 사람이 건물에 접근하고, 문을 통과하고, 난간을 잡고, 실내를 이동하는 지점을 표시하는 디자인 요소였다.

산업 생산과 공예

설리번은 주철과 테라코타처럼 같은 모양을 반복 생산할 수 있는 재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장식 원형을 만든 뒤 여러 부품을 찍어내 넓은 외벽에 반복했고, 설치되는 위치에 따라 무늬의 크기와 밀도를 조절했다.

실내에는 스텐실 장식과 모자이크, 스테인드글라스, 금속 세공, 목공을 함께 사용했다. 산업 생산이 가능한 부품과 공예가의 세밀한 제작을 나누지 않고, 같은 선과 무늬가 재료를 바꿔가며 이어지도록 설계했다.

이 과정에는 사무소의 제도사와 장식 디자이너, 테라코타 제작사, 금속공과 유리 공예가가 함께 참여했다. 설리번은 전체 원리를 세웠지만, 실제 장식은 여러 사람의 도면과 제작을 거쳐 완성됐다.

주요 작업

오디토리엄 빌딩

오디토리엄 빌딩(Auditorium Building, 1889)은 공연장과 호텔, 사무실, 상점, 식당을 한 건물에 넣은 대형 복합 건축이다. 중심에는 4,200석 규모의 공연장을 두고, 주변에 400개 객실을 갖춘 호텔과 130개가 넘는 사무실을 배치했다.

아들러는 넓은 객석에서도 무대의 소리가 고르게 전달되도록 음향과 구조, 환기 설비를 설계했다. 설리번은 로비에서 계단, 객석, 무대로 이어지는 공간에 곡선형 천장과 반복되는 아치, 스텐실 무늬와 모자이크를 배치했다.

육중한 석재 외관과 달리 실내는 곡선과 금빛 장식이 객석을 감싼다. 장식은 천장과 발코니, 조명 주변을 따라 이어지며 음향을 위해 만든 공간 구조와 하나로 연결됐다.

웨인라이트 빌딩

웨인라이트 빌딩(Wainwright Building, 1891)은 세인트루이스에 세운 10층 사무실 건물이다. 저층 상가와 반복되는 사무실 층, 꼭대기 설비층을 구분하면서도 긴 벽돌 피어를 위아래로 이어 전체 높이를 강조했다.

창과 스팬드럴은 세로 피어보다 안쪽으로 물려 있다. 이 차이가 반복되는 사무실 층을 하나의 긴 몸통으로 묶고, 건물이 위로 솟아 보이게 한다. 테라코타 장식은 창 사이와 건물 상부에 집중됐다.

웨인라이트 빌딩은 철골 고층건물의 구조적 최초는 아니다. 다만 새로운 골조와 사무실 프로그램에 어울리는 입면을 일관되게 정리한 초기 고층건물로 평가받는다.

교통관

교통관(Transportation Building, 1893)은 시카고 세계 컬럼비아 박람회를 위해 지은 임시 전시관이다. 흰색 고전주의 건물이 박람회장을 채운 가운데 설리번은 붉은색과 금색을 비롯한 여러 색을 외벽에 사용했다.

중앙 출입구인 황금의 문에는 여러 겹의 아치와 식물 무늬, 기하학 장식을 겹쳤다. 출입구를 건물 전체에서 가장 화려하게 만들어 관람객이 들어가는 위치를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 했다.

교통관은 박람회가 끝난 뒤 철거됐다. 프랑스 장식미술중앙연합은 이 건물의 건축과 장식을 인정해 세 개의 메달을 수여했다. 박람회장의 고전주의와 다른 방향을 제시한 설리번의 선택이 미국 밖에서 먼저 인정받은 사례다.

시카고 증권거래소 빌딩

시카고 증권거래소 빌딩(Chicago Stock Exchange Building, 1893~1894)은 고층 사무실과 2층 높이의 거래장을 결합한 건물이다. 거래장에는 높은 창과 발코니를 두고, 벽과 천장에는 반복되는 스텐실 무늬를 적용했다.

목재 난간과 금속 그릴, 색유리도 같은 기하학 질서에 맞췄다. 거래가 이뤄지는 넓은 공간을 하나의 장식 체계로 묶으면서도, 창을 통해 실내 깊숙이 빛이 들어오게 했다.

건물은 보존 운동에도 불구하고 1972년 철거됐다. 거래장 내부와 라살 스트리트 출입구 아치, 일부 장식 부재는 해체 과정에서 보존됐다. 거래장은 시카고 미술관 안에 다시 조립돼 1977년 공개됐다.

개런티 빌딩

개런티 빌딩(Guaranty Building, 1896)은 버펄로에 완공한 13층 사무실 건물이다. 붉은 테라코타 타일로 외벽 전체를 감싸고, 창과 피어, 스팬드럴 사이에 식물과 기하학 무늬를 촘촘하게 넣었다.

저층에는 상점과 출입구를 배치하고, 위에는 같은 크기의 사무실을 반복했다. 평면 가운데에는 빛이 안쪽 사무실까지 들어오도록 빈 공간을 뒀다.

멀리서는 긴 세로선과 반복되는 창이 높이를 강조하지만, 가까이에서는 외벽 전체를 덮은 테라코타 무늬가 드러난다. 고층건물의 기능 구분과 수직 비례, 산업 생산한 장식 부품이 가장 조밀하게 결합된 작업이다.

카슨 피리 스콧 백화점

슐레진저 앤 마이어 백화점(Schlesinger & Mayer Department Store, 1899~1904)은 이후 카슨 피리 스콧 백화점으로 운영됐으며, 현재는 설리번 센터로 불린다. 설리번은 사무실 건물과 달리 상품을 보여주고 사람이 드나드는 백화점의 기능에 맞춰 외관을 수평으로 구성했다.

위층에는 넓은 창을 반복해 판매 공간 안으로 빛을 끌어들였다. 거리와 맞닿은 1층과 2층에는 짙은 색 주철 장식을 집중하고, 모서리 출입구 주변에는 식물 줄기와 잎이 쇼윈도와 기둥을 감싸도록 배치했다.

사무실 건물에서는 세로선을 길게 이어 높이를 강조했지만, 이 건물에서는 진열창과 층 사이의 수평선을 앞세웠다. 같은 건축가가 건물의 용도에 따라 전혀 다른 외관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내셔널 파머스 뱅크

내셔널 파머스 뱅크(National Farmers’ Bank, 1908)는 미네소타주 오와토나에 세운 소규모 은행이다. 설리번이 중서부 소도시에 설계한 여덟 곳의 ‘주얼 박스 은행’ 가운데 첫 번째 건물이다.

육중한 사암 기단 위에 붉은 벽돌 벽을 세우고, 측면에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운 큰 아치형 창을 냈다. 입구와 지붕선에는 녹색과 푸른색 테라코타 장식을 배치했다.

실내에는 벽화와 색유리, 금속 장식, 조명, 가구를 함께 설계했다. 큰 아치형 창으로 들어온 빛은 색유리를 통과하며 실내의 벽화와 장식을 비춘다. 작은 은행이지만 외관과 실내, 가구를 하나의 체계로 구성한 작업이다.

연작의 마지막 건물은 1919년 완공된 위스콘신주 컬럼버스의 파머스 앤 머천츠 유니언 뱅크다. 설리번은 대형 고층건물에서 발전시킨 구조와 장식의 관계를 소도시의 거리와 작은 내부 공간에 맞게 다시 구성했다.

건축 장식 체계

《건축 장식 체계(A System of Architectural Ornament, 1924)》는 설리번이 말년에 정리한 글과 20장의 도판으로 구성된 책이다. 단순한 기하학 격자에서 선이 갈라지고 회전하며 식물과 비슷한 무늬로 자라나는 과정을 단계별로 그렸다.

설리번은 장식을 완성된 건물 위에 붙이는 별도 부품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중심과 축, 대칭, 반복, 성장 규칙을 세우면 장식이 같은 질서에서 나와야 한다고 봤다.

이 책은 특정 건물의 설계안보다 설리번이 평생 사용한 장식 생성 방식을 보여준다. 형태와 기능을 다룬 그의 건축론이 무장식주의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영향 관계

프랭크 퍼니스와 윌리엄 르배런 제니

설리번은 프랭크 퍼니스의 사무소에서 역사 양식의 정돈된 비례를 벗어나 재료와 구조를 강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접했다. 퍼니스가 사용한 큰 덩어리와 굵은 선, 기계 부품을 닮은 장식은 설리번이 미국 건축의 독자적인 형태를 찾는 데 영향을 줬다.

윌리엄 르배런 제니의 사무소에서는 철과 강철을 활용한 상업 건축을 배웠다. 설리번은 새로운 골조 기술을 발명하기보다, 그 기술로 만들어진 고층건물에 어떤 외관과 공간 구성이 필요한지를 발전시켰다.

설리번은 두 사람에게서 배운 내용을 그대로 합치지 않았다. 퍼니스의 대담한 형태와 제니의 구조 기술을 바탕으로 고층건물의 수직 구성과 유기적인 장식을 자신의 방식으로 정리했다.

당크마르 아들러

아들러는 설리번의 형태와 장식을 대형 건축으로 구현하게 한 핵심 파트너였다. 공연장의 음향과 구조, 환기, 설비를 해결하고 복잡한 공사와 사업을 운영했기 때문에 설리번은 공간 구성과 표면 디자인에 집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역할은 기술과 미술처럼 완전히 나뉘지 않았다. 오디토리엄 빌딩의 객석과 천장, 고층 사무실 건물의 골조와 외벽처럼 구조와 형태가 맞물리는 지점은 아들러와 설리번, 사무소 구성원이 함께 조정했다.

설리번의 이름만으로 아들러 앤 설리번 시기의 건물을 설명하면, 새로운 형태를 가능하게 한 구조와 음향, 설비 기술을 놓치게 된다. 두 사람의 파트너십은 건축가와 기술자가 각자의 역할을 더한 관계보다 하나의 건물을 함께 완성한 협업에 가까웠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1888년 아들러 앤 설리번에 들어가 1893년까지 일했다. 역사 양식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고, 건물의 용도와 재료, 장식을 하나의 원리에서 끌어내는 설리번의 태도를 배웠다.

라이트는 훗날 설리번을 독일어로 ‘친애하는 스승’을 뜻하는 리버 마이스터(Lieber Meister)라 불렀다. 낮고 수평으로 뻗은 주택과 대지에 맞춘 평면을 발전시키며 설리번의 생각을 다른 건축 유형으로 넓혔다.

설리번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문장도 “형태와 기능은 하나다”로 바꿔 설명했다. 라이트는 기능이 형태를 일방적으로 결정한다고 보기보다 두 요소가 설계 과정에서 함께 만들어져야 한다고 봤다.

조지 그랜트 엘름슬리와 프레리 스쿨

조지 그랜트 엘름슬리는 설리번 사무소에서 장식과 세부 도면을 맡았다. 설리번이 세운 장식 원리를 실제 패턴과 건축 부재로 구체화했으며, 이후 퍼셀 앤 엘름슬리에서 가구와 색유리, 금속 장식을 건물 전체에 연결했다.

프레리 스쿨 건축가들은 역사 양식 대신 재료와 용도, 지역 환경에서 형태를 찾는 설리번의 태도를 이어갔다. 다만 고층건물의 수직선보다 낮고 수평으로 뻗은 주택과 학교, 교회에 집중하면서 다른 건축 문법으로 발전시켰다.

설리번이 고층건물과 상업 건축에서 시험한 통합 설계는 후대 건축가를 거치며 주택의 평면과 가구, 조명, 색유리를 한꺼번에 다루는 방식으로 확장됐다.

수상·전시 이력

교통관과 생전의 인정

설리번은 1893년 시카고 세계 컬럼비아 박람회에서 교통관을 선보였다. 프랑스 장식미술중앙연합은 교통관의 건축과 장식을 인정해 세 개의 메달을 수여했다.

미국 박람회에서 고전주의와 다른 건물을 세운 설리번이 해외 장식미술계에서 먼저 인정받은 사례다. 다만 이 성과가 미국에서 대형 의뢰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금융 공황 이후 설리번의 사무소는 빠르게 위축됐다.

그는 건물뿐 아니라 글을 통해 자신의 건축관을 알렸다. 1896년 발표한 「고층 사무실 건물의 예술적 고찰」은 고층건물의 기능과 외관 구성을 설명했고, 《유치원 대화》와 《아이디어의 자서전》, 《건축 장식 체계》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AIA 골드 메달과 회고전

미국건축가협회는 1944년 설리번에게 사후 골드 메달을 수여했다. 협회가 개인에게 주는 최고 영예로, 고층건물과 미국 근대 건축에 미친 영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결정이었다.

1987년 뉴욕 쿠퍼 휴잇 디자인 뮤지엄에서는 《루이스 설리번: 장식의 기능》이 열렸다. 도면과 모형, 건축 장식, 철물, 책, 사진 등 약 180점을 통해 설리번의 장식을 근대 건축과 분리된 부속물이 아니라 핵심 설계 요소로 다시 다뤘다.

시카고 미술관은 설리번과 아들러의 도면, 사진, 장식 부재, 리처드 니켈의 기록을 수집하고 공개해 왔다. 철거된 건축물을 실물 부재와 도면, 사진으로 연구할 수 있게 한 이 자료는 설리번의 사후 평가를 바꾼 중요한 기반이 됐다.

반응과 평가

위상과 영향

웨인라이트 빌딩과 개런티 빌딩, 오디토리엄 빌딩, 내셔널 파머스 뱅크를 비롯한 여러 작품은 미국 국립역사기념물로 지정됐다. 오디토리엄 극장은 복원을 거쳐 공연장으로 계속 사용되며, 설리번 센터와 개런티 빌딩도 용도를 바꿔가며 보존되고 있다.

전후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는 설리번의 건물 상당수가 철거됐다. 1961년 개릭 극장에 이어 1972년 시카고 증권거래소 빌딩이 사라졌고, 철거 현장에서 건물 부재를 기록하고 수습하던 사진가 리처드 니켈도 붕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시카고 증권거래소의 거래장과 출입구 아치, 장식 부재는 시카고 미술관에 보존됐다. 한 건물을 통째로 지키지는 못했지만 실내와 외벽 일부, 도면과 사진을 함께 남기면서 건축 보존의 범위를 넓힌 사례가 됐다.

설리번의 글은 건축뿐 아니라 제품과 그래픽, 산업디자인에서도 기능과 형태의 관계를 설명하는 출발점으로 쓰인다. 다만 짧은 문장만 널리 퍼지면서, 장식과 공예를 함께 다룬 그의 실제 작업은 뒤늦게 다시 주목받았다.

디자인 반응

설리번의 건축은 거대한 도시 건물과 사람이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장식을 함께 다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멀리서는 반복되는 창과 세로선이 건물의 높이를 강조하고, 거리에서는 테라코타와 주철 무늬가 출입구와 쇼윈도의 위치를 알려준다.

장식을 긍정적으로 보는 쪽은 설리번이 산업 생산과 공예를 대립시키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반복 생산한 테라코타와 주철 부품을 쓰면서도 건물의 위치와 쓰임에 따라 무늬를 바꿨고, 외관과 실내, 가구와 조명에 같은 원리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반면 촘촘한 식물 장식은 단순한 형태를 추구한 후대 모더니즘과 맞지 않는 19세기식 장식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기능주의의 선구자로 설리번을 설명하는 쪽은 고층건물의 비례와 입면을 앞세웠고, 장식가로 평가하는 쪽은 표면의 무늬와 공예가 빠지면 그의 건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봤다.

비판

설리번을 ‘마천루의 아버지’나 건물의 단독 저자로만 다루면 협업자의 역할이 가려진다. 아들러는 음향과 구조, 설비, 공사 운영을 맡았고, 엘름슬리와 라이트를 비롯한 사무소 구성원은 도면과 장식 작업에 참여했다. 테라코타와 금속, 유리, 벽화를 제작한 공예가의 역할도 설리번보다 적게 알려졌다.

웨인라이트 빌딩을 철골 구조가 외관에 그대로 드러난 건물로 설명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외벽의 세로 피어는 내부 철골 기둥과 일대일로 일치하지 않는다. 설리번은 구조를 그대로 노출한 것이 아니라 고층건물의 기능과 높이를 강조하도록 외관을 다시 설계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문장도 형태가 하나의 기능에서 자동으로 나온다는 뜻으로 쓰이면 한계가 생긴다. 실제 건축의 형태는 구조와 용도뿐 아니라 재료, 공사비, 시공 기술, 도시 규제, 건축주와 사용자의 요구가 함께 바꾼다.

설리번이 말한 기능은 이보다 넓은 개념이었지만, 짧은 구호로 퍼지는 과정에서 장식과 협업, 도시 환경을 다룬 그의 작업이 빠졌다. 설리번을 무장식 기능주의의 출발점으로만 설명하면 그의 건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식과 공예를 오히려 설명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