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랑스 반 덴 애커 (Laurens van den Acker)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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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tti Blume

로랑스 반 덴 애커(Laurens van den Acker)는 2009년 르노(Renault)에 합류해 현재 르노그룹 최고디자인책임자(CDO)를 맡고 있는 네덜란드 출신의 자동차 디자이너다. 양산차 디자인을 직접 진두지휘하던 시기에는 콘셉트카 '데지르(DeZir)'를 필두로 4세대 클리오, 캡처 등을 연달아 성공시켰고, 거대한 로장주(Losange) 엠블럼과 부드러운 곡면을 교차시킨 새로운 디자인 체계를 확립했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생애 주기형(Life-cycle)' 디자인 전략이다. 사랑, 탐험, 가족, 일, 놀이, 지혜라는 인간의 6가지 삶의 단계에 맞춰 콘셉트카와 양산차를 1:1로 직조해 냈다. 기계적인 패밀리룩의 단순 반복을 넘어, 자동차가 맡은 역할과 감성적 서사를 먼저 규정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현재 그는 특정 모델의 스케치를 직접 그리는 실무 단계를 넘어 르노, 다치아, 알핀, 모빌라이즈, 르노코리아 등 그룹 내 다종다양한 브랜드의 시각적 차이를 조율하는 디자인 경영자로 활약 중이다. 르노코리아의 그랑 콜레오스, 다치아 빅스터, 알핀의 드림 개러지 등 같은 그룹 산하에서도 완벽하게 분리된 조형이 탄생하는 배경에는 파리 본사와 글로벌 현지 스튜디오에 권한을 분배한 그의 거시적인 조직 운영 철학이 자리한다.

약력·연혁

1965년 네덜란드 데우르너에서 태어난 반 덴 애커는 델프트공과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 공학을 수학하며, 단순한 스타일링을 넘어 제품 개발과 인간공학, 생산 공정을 포괄적으로 통제하는 감각을 익혔다. 졸업 후 이탈디자인과 아우디를 거치며 이탈리아 카로체리아의 직관적인 콘셉트 개발 방식과 독일 제조사의 정밀한 양산 공정을 두루 흡수했다. 1990년대 포드에 합류해 유럽과 북미 스튜디오를 오가며 거대 그룹의 플랫폼 공유 및 브랜드 분화 전략을 체득했고, 이는 훗날 르노그룹의 다브랜드 체계를 조율하는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2006년 마쓰다의 글로벌 디자인 총괄로 부임한 그는 물과 바람의 흐름을 차체에 새긴 '나가레(Nagare)' 콘셉트 시리즈를 연달아 선보이며, 여러 대의 콘셉트카를 관통하는 통합적인 디자인 연구 방식을 정립했다. 2009년 패트릭 르 케망의 뒤를 이어 르노 디자인 총괄로 부임한 후, 중구난방이던 라인업을 거대한 로장주 엠블럼 중심의 명료한 패밀리룩으로 정돈했다. 2010년 '데지르'를 시작으로 한 6단계 생애 주기형 콘셉트를 4세대 클리오와 캡처 등 대중 양산차로 완벽하게 이식하며 브랜드의 상업적 부활을 이끌었다. 2023년 르노그룹 최고디자인책임자로 승진한 그는 르노, 다치아, 알핀 등 브랜드별 디자인 수장에게 독립적 권한을 부여하고, 지역 스튜디오 중심의 글로벌 현지화 설계 전략을 주도하며 디자인을 그룹 경영의 핵심 축으로 격상시켰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생애 주기 서사와 연속형 콘셉트

차급과 배기량의 기계적 분류를 탈피해 연애, 여행, 가족, 일 등 인간의 6가지 삶의 단계를 자동차의 형태로 규정하는 '생애 주기(Life-cycle)' 전략을 도입했다. 한 대의 고립된 쇼카가 아니라, 명확한 서사를 공유하는 여러 대의 콘셉트카를 연속적으로 발표하고 이를 대중적인 양산차로 직결시키는 치밀한 연구 방식을 구사한다.

중앙 집중형 엠블럼과 유기적 볼륨

보닛과 범퍼, 램프 그래픽의 시작점이 되는 거대한 로장주 엠블럼을 전면부 중앙에 배치해 르노의 시각적 구심점을 강력하게 확립했다. 도어와 펜더는 유기적이고 부드러운 곡면으로 부풀리는 반면, 벨트라인과 휠 아치 주변은 날카롭게 당겨 스탠스를 안정적으로 쥐어잡는 '팽팽한 볼륨감'을 주조한다.

다브랜드 포트폴리오와 현지화 조직

그룹 산하 브랜드들이 플랫폼을 공유하면서도 시각적으로 완벽히 분리되도록 조율한다. 르노의 첨단 기술, 다치아의 견고한 실용성, 알핀의 경량 스포츠카 비례 등 브랜드별 구조적 방향성을 선제적으로 규정한다. 동시에 파리의 일방적인 하향식 통제를 배제하고 서울, 부쿠레슈티, 첸나이 등 현지 지역 스튜디오가 자국 시장의 요구를 직접 관찰해 설계에 반영하도록 권한을 분산시킨다.

헤리티지의 현대적 전동화

르노 5, 르노 4 등 브랜드의 상징적인 과거 유산을 단순한 껍데기 복각을 넘어 동시대 전기차 플랫폼에 맞게 갱신한다. 원작의 고유한 비례와 디테일을 차용하되 철저히 현대적인 사용성을 부여해, 과거의 아카이브를 미래 전동화 시대를 돌파할 강력한 무기로 재활용한다.

주요 작업

마쓰다 나가레

마쓰다 나가레(Mazda Nagare, 2006)는 물과 바람 등 자연의 흐름을 차체 표면에 새겨 넣은 혁신적인 콘셉트카다. 유기적인 선과 조각적인 표면을 결합해 시각적 파격을 안겼으며, 이후 여러 차종으로 확장되는 '연속적 콘셉트 연구'라는 그의 조직 운영 방법론의 훌륭한 시험대가 됐다.

르노 데지르

르노 데지르(Renault DeZir, 2010)는 반 덴 애커가 르노에서 첫선을 보인 전기 스포츠카 콘셉트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강렬한 붉은 차체와 엠블럼 중심의 전면 그래픽, 역동적인 버터플라이 도어로 시각화하며 2010년대 르노 패밀리룩의 위대한 신호탄이 되었다.

4세대 르노 클리오

4세대 르노 클리오(Renault Clio, 2012)는 데지르 콘셉트의 관능적인 곡면과 대형 로장주 엠블럼을 대량 생산 소형차에 성공적으로 이식한 모델이다. 뒷도어 손잡이를 윈도우 뒤로 은닉해 3도어 쿠페의 스포티함을 연출했으며, 반 덴 애커 체제의 상업적 부활을 견인한 핵심작이다.

르노 5 프로토타입

르노 5 프로토타입(Renault 5 Prototype, 2021)은 1970년대의 아이콘 '르노 5'를 도심형 전기 소형차로 완벽하게 부활시킨 콘셉트다. 수직형 테일램프와 보닛의 비대칭 흡기구 그래픽 등 아카이브의 특징을 전기차의 위트 있는 디자인 요소로 변환해, 레트로 퓨처리즘의 정수를 보여줬다.

다치아 빅스터

다치아 빅스터(Dacia Bigster, 2024)는 실용주의 브랜드 다치아의 체급을 준중형 SUV 시장으로 밀어 올린 전략 모델이다. 장식적인 크롬을 철저히 배제하고 재활용 플라스틱 하단 보호재를 적극 노출하는 등, '저비용'이라는 물리적 조건을 날카로운 실용적 매력으로 승화시키며 르노와 완벽히 차별화된 다치아만의 정체성을 선언했다.

르노 필랑트

르노 필랑트(Renault Filante, 2026)는 르노코리아 서울 디자인센터가 한국 시장의 요구를 관찰해 프랑스 본사와 합작해 낸 대형 크로스오버다. 현지 시장이 선호하는 넓은 거주성과 유려한 패스트백 루프라인을 결합해, 철저한 현지화와 글로벌 정체성을 능숙하게 융합한 반 덴 애커식 거시적 조직 경영의 산물이다.

영향 관계

패트릭 르 케망의 아방가르드 유산

전임자 패트릭 르 케망(Patrick Le Quément)이 아방타임, 벨 사티스 등을 통해 증명한 대중차 브랜드의 파격적 조형 실험 정신을 이어받았다. 단, 르 케망 체제의 파편화된 라인업을 반면교사 삼아, 개별 모델의 독창성보다 라인업 전체를 하나의 시각적 덩어리로 묶어내는 강력한 패밀리룩 제어 방식을 택했다.

이탈디자인과 포드의 다브랜드 인프라

이탈리아 카로체리아 특유의 직관적이고 빠른 콘셉트 전개 방식과, 아우디 및 포드에서 체득한 대형 제조사의 생산 공정·플랫폼 공유 전략을 통합했다. 이러한 경험의 융합은 르노그룹이라는 거대 포트폴리오 산하에서 브랜드 간 간섭을 막고 고유의 색깔을 부여하는 최상위 디자인 경영의 토대가 됐다.

분권화된 지역 스튜디오 체제

질 비달(르노), 데이비드 듀랑(다치아), 안토니 빌랭(알핀) 등 브랜드별 디자인 수장에게 전권을 위임해 각기 다른 해답을 도출하도록 이끈다. 특히 서울, 첸나이, 부쿠레슈티 등의 지역 디자인 센터가 단순한 스케치 하청 기지가 아니라 현지 고객을 분석하는 전초기지로 작동하게 만들어 글로벌 디자인 생태계를 탈중앙화시켰다.

수상·전시 이력

로랑스 반 덴 애커는 르노의 침체된 디자인 체계를 혁신적으로 쇄신하고 클리오, 캡처 등 양산차의 거대한 성공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영국 자동차 매체 오토카(Autocar)가 선정한 '올해의 디자이너상'을 수상했다. 데지르, 트레조르, 심비오즈 등의 콘셉트카는 파리 및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브랜드의 예술적 비전을 증명했으며, 특히 르노 5 프로토타입은 각종 글로벌 디자인 어워드 콘셉트카 부문을 석권하며 헤리티지를 바탕으로 한 전동화 전략의 우수성을 국제적으로 입증했다.

반응과 평가

로랑스 반 덴 애커는 침체되어 있던 르노의 라인업을 거대한 로장주 엠블럼과 유기적인 볼륨의 직관적인 디자인 체계로 탈바꿈시키며 브랜드의 상업적 르네상스를 이끈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는다. 차량의 개발 목적을 인간의 6가지 생애 주기 서사로 풀어낸 그의 접근법은 대중이 복잡한 자동차 포트폴리오를 감성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탁월한 기제로 작용했다. 최고디자인책임자(CDO) 부임 이후에는 한 명의 '스타 디자이너'가 모든 스케치를 통제하는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르노, 다치아, 알핀 등 다브랜드 생태계의 충돌을 방지하고 각 지역 스튜디오의 독립성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디자인 경영자로서의 역량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 패밀리룩의 강력한 통제가 낳은 부작용도 존재한다. 대형 엠블럼과 굵직한 C자형 주간주행등, 크롬 장식이 차급을 가리지 않고 획일적으로 반복 적용되면서 개별 차종의 독창성과 권위가 약화되고 전면부가 무겁게 과장되어 보인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됐다. 또한 세닉과 에스파스 등에서 역동적인 크로스오버 비례를 구현하기 위해 대형 휠과 낮은 루프라인을 채택한 결과, 가족용 MPV 본연의 쾌적한 승차감과 공간 활용성이 다소 희생됐다는 지적도 피하기 어렵다. 최근 르노 5와 르노 4 등 아카이브에 기댄 전동화 전략 역시 유산의 영리한 계승이라는 찬사와 함께, 완전히 새로운 아이콘을 창조하는 대신 과거의 후광에 의존하는 안전한 노선을 택했다는 양가적인 시선이 교차한다. 플랫폼 공유가 고도화되는 그룹 환경 속에서, 피상적인 그래픽 차이를 넘어 브랜드별 근본적인 형태와 구조적 독창성을 어떻게 방어해 낼 것인지가 그에게 남겨진 가장 날카로운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