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그리치치 (Konstantin Grcic)

개요

<img src="https://d2xsxph8kpxj0f.cloudfront.net/310519663429662740/ffcjRzrXsTCDKgX6s8aDwC/articles/1786251989607-a464198c990058c6.webp" alt="" data-orientation="original" data-original-src="https://d2xsxph8kpxj0f.cloudfront.net/310519663429662740/ffcjRzrXsTCDKgX6s8aDwC/articles/1786251992206-310e7b80eccac41a.webp" width="600" />

© magisdesign콘스탄틴 그리치치는 재료의 특징과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방식을 형태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아 온 독일의 산업디자이너다. 1965년 독일 뮌헨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전통 가구 만드는 법을 배운 뒤 런던 왕립예술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했다. 이후 재스퍼 모리슨 스튜디오를 거쳐 1991년 자신의 스튜디오를 차렸으며 현재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들은 매끈하고 친절하게 포장된 일반적인 디자인과 거리가 멀다. 알루미늄을 틀에 부어 구멍이 숭숭 뚫린 입체 좌판을 만들어낸 체어 원(Chair_ONE) 똑바른 자세로 앉는 것을 피하고 사용자가 자꾸 몸을 돌리도록 유도하는 360도 체어 공사장의 튼튼한 작업등을 세련된 실내 조명으로 바꾼 메이데이(Mayday)가 대표적이다. 모양이 다소 낯설고 거칠더라도 그 구조가 물건의 쓰임새와 만드는 방식에 딱 맞는다면 과감하게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내세운다.

30년 넘게 플로스나 마지스 같은 유명 제조사들과 일해 온 그는 2025년 자신의 실험적인 디자인 상표 25kg를 새로 선보였다. 디자이너가 단순히 도면만 넘기는 역할에서 벗어나 직접 적은 양을 만들고 파는 주도권을 쥐면서 거대 자본 밖의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약력·연혁

영국에서 나무를 깎고 가구를 만드는 일부터 배운 경험은 그의 디자인 인생 전체를 꿰뚫는 바탕이 된다. 단순히 예쁜 모양에 갇히지 않고 재료가 어떻게 힘을 받고 어디를 이어야 튼튼한지에 대한 고민을 산업디자인으로 그대로 가져왔다. 이후 런던 왕립예술학교를 거쳐 재스퍼 모리슨과 일하며 깔끔하고 절제된 디자인을 배웠지만 독립한 뒤에는 훨씬 실험적이고 산업 기술 중심적인 자신만의 길을 만들었다.

1999년 플로스에서 발표한 이동식 조명 메이데이로 큰 상인 황금콤파스상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특히 2004년 마지스와 함께 4년 동안 틀을 깎아 만든 체어 원은 21세기 의자 디자인의 상징이 되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360도 체어 등을 통해 단순히 기하학적인 모양을 넘어서 사람들이 물건을 쓰는 방식 자체를 새롭게 바꾸는 단계로 나아갔다.

2018년 스튜디오를 베를린으로 옮긴 후 건축과 패션 등으로 영역을 넓혔다. 이어 2025년에는 대형 제조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거친 아이디어를 직접 만들어 파는 독자 브랜드 25kg를 세우며 활동 범위를 더욱 넓히고 있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그의 디자인은 예쁜 모양을 먼저 그려놓고 공장에 억지로 맞추는 방식이 아니다. 알루미늄을 틀에 부어 만들거나 버려진 플라스틱을 찍어내는 등 기계와 재료의 한계가 무엇인지 먼저 파악하고 그 안에서 가장 튼튼하고 합리적인 뼈대를 남기는 과정 자체가 디자인이 된다. 쓸데없는 면을 비워내고 뼈대만 남긴 체어 원이 그 증거다. 때로는 첫눈에 불편하고 차가워 보일지라도 그 모양을 굳이 숨기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360도 체어처럼 의자가 사람의 행동과 자세를 능동적으로 바꾸도록 훈련시킨다.

이 과정에서 컴퓨터 그래픽에 기대기보다 골판지와 철사 등을 활용해 실제 크기의 모형을 수십 번씩 고치고 깎아내며 튼튼한 구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방식을 굳게 지킨다. 어느 하나 성공했다고 해서 그 스타일을 똑같이 반복하지도 않는다. 각진 모양의 체어 원이 큰 성공을 거두며 그의 상징이 될 것 같자 곧바로 부드러운 곡선을 쓴 의자를 내놓으며 브랜드의 뻔한 예상을 가볍게 깼다. 완성된 조각품을 만들기보다 메이데이 조명처럼 사용자가 쥐고 던지고 걸어두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실용적인 도구를 만드는 데 가장 큰 뜻을 둔다.

주요 작업

25kg 레이블의 THING 시리즈 (2025)

기존 제조사의 틀을 깨고 자신이 직접 시작한 독립 브랜드의 첫 결과물들이다. 스테인리스 기둥의 용접 자국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스툴 띵 원(THING_01) 무거운 아연 도금 뼈대 위에 화산석을 거칠게 얹어낸 띵 투(THING_02)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뻔한 모양에서 벗어나 재료의 진짜 느낌을 살리려는 그의 최근 고민을 보여준다.

벨 체어 (2020)

마지스와 함께 산업 폐기물로 버려지는 플라스틱을 100퍼센트 재활용해 만든 겹쳐 쌓을 수 있는 의자다. 비싼 친환경 마케팅 대신 실제 부품 수와 재료 사용량을 크게 줄이면서도 야외에서 쓸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찍어내는 기술을 완벽하게 다뤘다.

OK 조명 (2013)

아킬레 카스틸리오니가 남긴 전설적인 걸작 파렌테시 조명을 LED 기술로 새롭게 바꾼 작품이다. 천장과 바닥을 팽팽하게 잇는 끈 구조의 핵심은 그대로 살리되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얇고 평평한 원형 LED 판을 달아 빛의 방향을 더 편하게 조절하도록 만들었다.

360° 체어 (2009)

사무용 의자는 넓고 푹신해야 한다는 뻔한 생각을 부순 마지스의 작업용 의자다. 앞뒤가 불분명한 좁고 긴 좌판과 등받이 같지 않은 작은 지지대를 꽂아 넣었다.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있는 편안함 대신 사용자가 계속해서 몸을 돌리고 자세를 바꾸게 만들어 짧고 활동적인 업무 환경에 딱 맞게 고안했다.

Chair_ONE (2004)

21세기 산업디자인의 흐름을 흔든 그리치치의 대표작이다. 알루미늄을 틀에 찍어내는 기술을 활용해 면과 면이 만나는 뼈대 부분만 남기고 속을 시원하게 비워냈다. 종이접기를 한 듯한 차가운 금속 좌판을 만들기 위해 무려 4년 동안 거대한 틀을 깎고 다듬었다. 2025년 출시 20주년을 맞아 에트나산 화산석 받침을 더한 특별판을 선보일 만큼 생명력이 길다.

Mayday (1999)

차고나 공사장에서 쓰는 싼 작업등의 구조를 고급 주거 공간의 세련된 조명으로 끌어올린 플로스의 대표작이다. 고깔 모양 덮개에 달린 거대한 손잡이는 조명을 들고 다니는 부위이면서 동시에 벽에 거는 고리 역할을 한다. 조명을 얌전히 감상하는 물건에서 언제든 옮겨 쓸 수 있는 유쾌한 도구로 바꿨다.

영향 관계

가구를 직접 손으로 만들다가 산업디자인으로 넘어온 흔치 않은 경력을 가졌다. 나무를 다루며 배운 탄탄한 구조 계산법을 플라스틱과 금속을 다루는 공장 생산 방식으로 부드럽게 바꿔냈다. 과거 함께 일했던 재스퍼 모리슨이 모양을 최대한 지워버리는 평범함을 추구했다면 그리치치는 공장에서 만든 흔적을 굳이 숨기지 않는 기계적인 느낌을 자신만의 확실한 무기로 만들었다. 그의 베를린 스튜디오는 스테판 디츠 등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후배 디자이너들을 길러낸 훌륭한 학교 역할도 하고 있다.

수상·전시 이력

디자인계의 큰 상인 이탈리아 황금콤파스상을 메이데이 미토(Myto) OK 조명으로 세 번이나 받으며 산업디자인의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2014년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은 그의 작업물과 고민을 모두 모아 보여주는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고 체어 원 등 수많은 작품이 뉴욕 현대미술관에 영구 소장되어 있다. 2026년에는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기후 변화와 겨울 스포츠를 엮어낸 화이트 아웃 전시를 공동 기획하며 단순한 물건 제작자를 넘어 공간과 시대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기획자로 발전하고 있다.

반응과 평가

그리치치는 부드럽고 친절한 모양이 인기를 끌던 1990년대 이후 유럽 디자인계에 공장에서 찍어낸 뼈대를 그대로 보여주는 자신만의 방식을 안착시킨 뛰어난 디자이너다. 왜 이 의자가 각이 져 있는지 플라스틱은 왜 이 모양으로 나왔는지를 기술자처럼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해 내는 점이 그가 찬사를 받는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360도 체어나 체어 원처럼 겉보기에 차갑고 딱딱한 기하학적 형태들은 따뜻한 가정집 거실보다는 미술관이나 공공장소에 덩그러니 놓일 때 더 어울린다는 아쉬운 목소리도 꾸준히 나온다. 사람의 편안함보다 디자이너의 구조적인 아이디어가 먼저 강조되다 보니 결국 사용자가 낯선 모양에 억지로 몸을 맞춰야 한다는 날카로운 비판도 함께 받는다.

또한 처음에는 플라스틱을 값싸고 튼튼하게 다루려 했지만 결국 그의 주요 작업들은 거대한 틀과 막대한 개발비가 필요한 대규모 공장 생산 시스템에 크게 기대고 있다. 2025년 야심 차게 시작한 소량 생산 상표 25kg은 거대 제조사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시도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디자인이 누구나 살 수 있는 대중적인 물건에서 벗어나 소수만 즐기는 비싼 수집품 시장으로 넘어가는 것 아니냐는 냉정한 질문도 뒤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