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틸 토르센 (Kjetil Trædal Thorsen)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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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jornar Ovrebo
셰틸 토르센(Kjetil Trædal Thorsen)은 건축, 조경, 인테리어, 그래픽, 제품 디자인을 통합적인 관점에서 다루는 설계 집단 '스노헤타(Snøhetta)'의 공동 창립자다. 1958년 노르웨이 헤우게순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그라츠 공과대학교에서 건축을 수학했다. 1989년 스노헤타 출범 이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오슬로 오페라하우스, 뉴욕 9·11 메모리얼 뮤지엄 파빌리온 등 당대의 굵직한 대형 문화시설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그의 작업은 건축물과 대지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관성을 깨는 데서 출발한다. 지붕을 시민이 걷는 광장으로 내어주거나, 건물을 지면 아래 혹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비스듬히 걸쳐 놓는다. 오슬로 오페라하우스의 하얀 석재 지붕이 항구 수면에서부터 완만하게 솟아올라 누구에게나 열린 도시의 산책로로 기능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다만 스노헤타의 작업물을 토르센 한 사람의 단독 성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스노헤타는 다학제적 전문가들과 프로젝트별 파트너들이 수평적으로 얽힌 거대한 유기체다. 토르센은 디테일을 독단적으로 스케치하는 작가라기보다, 사무소가 견지해야 할 공공의 철학과 협업의 구조를 튼튼하게 직조해 낸 창작 책임자에 가깝다.
약력·연혁
그라츠 공과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토르센은 1985년 오슬로에 노르웨이 최초의 건축 전문 갤러리 중 하나인 '롬(ROM)' 설립에 참여했다. 이는 건축을 단순히 건설 산업의 결과물로 가두지 않고 담론과 예술의 궤도 위로 끌어올리려는 선구적인 움직임이었다. 이후 1980년대 후반, 뜻을 함께하는 건축가 및 조경가들과 노르웨이 도브레산맥 최고봉의 이름을 딴 '스노헤타'를 결성했고 1989년 사무소를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설립 원년인 1989년, 소규모 신생 사무소였던 스노헤타가 이집트의 국가적 사업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국제 공모에 당선되며 조직은 거대한 전기를 맞았다. 완공까지 10여 년이 소요된 이 프로젝트에서 토르센은 이집트 정부, 유네스코, 다국적 기술진과의 지난한 조율 과정을 총괄하며,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합의에 이르는 ‘협상된 건축’이라는 스노헤타 특유의 방법론을 세웠다. 2008년 오슬로 오페라하우스를 통해 건축물 지붕을 도시의 인프라로 환원하는 파격적 공공성을 증명한 이후, 뉴욕 9·11 메모리얼 파빌리온, 사우디아라비아 이트라 문화센터 등 전 세계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2020년대에 들어서도 베이징 도서관, 부산 오페라하우스 등 대형 공공 프로젝트를 연이어 수행하고 있다. 거대해진 조직 안에서 그는 개별 실무를 통솔하기보다 스노헤타를 관통하는 자연과 협업, 공공성의 가치를 전파하는 파운딩 파트너의 역할에 무게를 두고 있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건축과 지형의 경계 소거
토르센의 건축에서 형태와 조경, 내부 단면은 결코 개별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건물의 지붕은 광장으로 매끄럽게 연장되고, 바닥의 기울기는 자연스러운 지형이 되며, 외부의 조경은 실내 동선 깊숙이 스며든다. 바다를 향해 비스듬히 누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원형 지붕이나 보행망을 지붕 위로 끌어올린 오슬로 오페라하우스처럼, 건물의 외피를 단순한 껍데기가 아닌 입체적인 공공 지형으로 치환한다. 권위적인 정면 입구나 높은 계단을 배제함으로써, 문화시설을 목적 없는 시민들도 기꺼이 통과하고 머무는 일상적인 장소로 개방한다.
수평적 다학제 협업 체계
스노헤타는 건축 설계가 끝난 뒤 조경가와 디자이너를 하청처럼 호출하는 수직적 관행을 철저히 거부한다. 극초기 구상 단계부터 건축, 조경, 인테리어, 예술 분야의 실무진이 동일한 도면과 모형을 두고 동등하게 충돌한다. 더 나아가 토르센은 행정기관이나 대중 등 외부 이해관계자와의 타협을 창작성의 훼손으로 보지 않고, 공간의 진정한 쓸모를 찾아가는 필수적인 설계 과정으로 수용한다. 이처럼 견고한 다학제 협업 구조 덕분에 스노헤타의 건축은 특정 작가의 고정된 스타일에 매몰되지 않고, 대상지의 기후와 조건에 맞춰 거친 콘크리트(언더)부터 투명한 유리 파빌리온(9·11 메모리얼)까지 무한히 변주될 수 있다.
주요 작업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2001)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고대 도서관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킨 프로젝트이자 스노헤타를 글로벌 설계 집단으로 도약시킨 기념비적 작품이다. 지면에서 바다를 향해 비스듬히 기우는 거대한 원형 지붕을 얹고, 외벽 전면에는 세계 각국의 문자와 기호를 각인한 석재를 둘러 묵직한 서사를 부여했다. 북향 천창으로 은은한 간접광을 들이는 2만㎡ 규모의 계단식 열람실을 구축하며, 건축과 조경, 예술과 그래픽을 단일한 공간 경험으로 완벽히 통합해 냈다.
노르웨이 국립 오페라·발레 (2008)
오슬로 비외르비카 항만에 자리한 이 공연장은 엘리트주의적 문화시설의 권위를 허물고 건축물을 도시의 광장으로 내어준 스노헤타의 마스터피스다. 항구의 수면에서부터 하얀 석재 지붕이 완만하게 솟아올라, 관람권이 없는 일반 시민들도 자연스럽게 지붕을 밟고 올라가 도시와 바다의 풍경을 향유할 수 있다. 차갑고 개방적인 외부 석재와 대비되도록 주 공연장 내부는 짙고 따뜻한 목재로 마감해 시각적이고 질감적인 깊이를 극대화했다.
9·11 메모리얼 뮤지엄 파빌리온 (2014)
뉴욕 그라운드 제로의 광장에서 지하 추모 박물관으로 진입하는 유일한 지상 출입구다. 평탄한 추모 광장 위에 비스듬한 유리와 금속 소재의 기하학적인 조형물을 낮게 얹어 지상과 지하를 고요하게 매개한다. 파빌리온 내부로 쏟아지는 자연광 속에서 옛 세계무역센터의 거대한 철골 기둥과 조우하게 되며, 일상적인 도시의 밝은 빛에서 지하의 엄숙한 심연으로 관람객을 서서히 안내하는 절제된 전이 공간이다.
언더 (2019)
노르웨이 린데스네스 해안에 세워진 유럽 최초의 수중 레스토랑이다. 육중한 콘크리트 매스가 육지에서 바다 밑바닥을 향해 비스듬히 가라앉은 형태를 취한다. 거친 콘크리트 외벽은 세월이 흐르며 해양 생물이 기착하는 인공 암초의 역할을 겸하도록 설계되었다. 방문객이 육지에서 수면을 거쳐 해저에 위치한 투명한 대형 아크릴 창에 닿기까지, 심해로 잠수하듯 건축물의 단면을 수직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대담한 생태적 건축 실험이다.
베이징 도서관 (2023)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축적한 대형 공공 열람실의 노하우를 중국 베이징의 거대한 스케일과 현대적 정보 환경에 맞춰 진화시킨 결과물이다. 은행나무 숲을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형태의 기둥들이 캐노피처럼 넓게 펼쳐진 지붕을 웅장하게 지탱한다. 기둥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낮은 계단과 테라스는 단순한 열람을 넘어 시민들이 흩어져 교류하고 휴식하는 거대한 실내 공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영향 관계
토르센의 건축은 북유럽 모더니즘 특유의 절제된 물성과 강한 공공성에 뿌리를 두면서도, 정돈된 박스 형태에 머물던 과거의 유산을 지형과 보행로 단위의 거대한 도시 인프라로 팽창시켰다. 알바 알토 이래 북유럽 건축이 고집스럽게 탐구해 온 자연과 재료의 관계를 초대형 문화시설의 스케일로 확대한 셈이다. 아울러 그의 가장 뚜렷한 족적은 특정한 조형 언어의 발명이 아니라, 크레이그 다이커스를 비롯한 공동 창립자 및 다방면의 전문가들이 수직적 권위 없이 얽히는 다학제적 조직 문화를 설계했다는 데 있다. 오슬로 오페라하우스 이후 지붕을 개방하여 건물을 도시의 산책로로 편입시키는 스노헤타식 해법은, 상하이와 부산 등 전 세계 수변 도시의 설계 공모에서 벤치마킹되는 강력한 글로벌 스탠다드로 자리 잡았다.
수상·전시 이력
국제적 명성의 신호탄이 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프로젝트로 2004년 아가 칸 건축상을 거머쥐었으며, 오슬로 오페라하우스로 2009년 유럽 최고 권위의 미스 반 데어 로에상을 수상하며 현대 건축의 최전선에 섰다. 토르센 개인으로는 2008년 노르웨이 왕립 성 올라프 훈장 수훈에 이어, 2024년 프레임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그간의 헌신을 인정받았다. 현재 스노헤타는 건축뿐 아니라 조경, 그래픽, 인테리어 전반에 걸쳐 수많은 국제 디자인상을 휩쓸고 있으나, 이는 스타 건축가 1인의 천재성이 아닌 조직 내 수많은 파트너와 설계팀이 일궈낸 치열한 집단 지성의 성과로 평가된다.
반응과 평가
토르센은 북유럽 특유의 급진적인 공공성을 전 세계 도시의 랜드마크로 이식하며, 단일 건물을 넘어 시민의 일상적 보행 지형을 설계하는 선구자로 칭송받는다. 건축과 조경의 물리적 경계를 허물고 지붕과 광장에 입장권 없이 자유롭게 진입하도록 한 스노헤타의 접근법은, 그간 배타적이었던 엘리트 문화시설의 문턱을 획기적으로 낮췄다는 굳건한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대륙을 횡단하는 거대 디자인 제국으로 성장한 현재의 스노헤타에서, 토르센의 리더십은 실무 스케치를 지시하는 것을 넘어 조직의 창작 문화와 장기적 비전을 통솔하는 철학적 구심점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오슬로 오페라하우스의 거대한 성공 이후, 경사진 지붕과 보행 가능한 옥상이라는 해법이 여러 글로벌 프로젝트에서 기계적으로 반복되며 스노헤타만의 정형화된 공공성 연출 공식으로 굳어졌다는 냉소적인 비판도 상존한다. 치열한 집단 설계와 수평적 협업을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와 성과가 결국 토르센을 비롯한 소수의 창립자 이름표로 수렴되는 건축계의 구조적 모순 역시 피하기 어렵다. 나아가, 건물의 외피를 공공 지형으로 개방하는 설계는 막대한 초기 시공비뿐만 아니라 방수, 미끄럼 방지, 제설 등 척박한 유지관리 비용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이러한 건축적 해법은 강력한 자본력이 뒷받침되는 국가 주도의 항만 재생지에서는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지만, 토지의 상업적 밀도가 높고 민간 수익성이 우선시되는 고밀도 도심에서는 동일한 낭만적 원리를 온전히 구현하기 어렵다는 뼈아픈 한계 역시 지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