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세 크로포드 (Ilse Crawford)

개요

<img src="https://d2xsxph8kpxj0f.cloudfront.net/310519663429662740/ffcjRzrXsTCDKgX6s8aDwC/articles/1783425575509-7313bb1425a32a78.webp" alt="Ilse Crawford" data-orientation="portrait" data-original-src="https://d2xsxph8kpxj0f.cloudfront.net/310519663429662740/ffcjRzrXsTCDKgX6s8aDwC/articles/1783425576371-37fcddda89d5f6cd.webp" data-source-url="https://thegentlewoman.co.uk/library/ilse-crawford" width="600" />

일세 크로포드(Ilse Crawford, 1962~)는 영국의 인테리어·가구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스튜디오 스튜디오일세(Studioilse)의 설립자다. 잡지 편집자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1989년 영국판 《엘르 데코레이션》을 창간해 약 10년간 편집장을 맡았고, 마흔을 앞두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나섰다.

크로포드는 공간을 만들 때 눈에 보이는 모양보다 그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느끼고 행동하는지를 먼저 따진다. 이 태도를 그녀는 '웰빙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wellbeing)'이라 부른다. 디자인을 완성된 물건이 아니라 삶을 떠받치는 틀로 보는 생각으로, 책 제목이자 스튜디오의 표어인 '삶을 위한 틀(A Frame for Life)'이 이를 요약한다.

대표작으로는 뉴욕 소호하우스(Soho House), 스톡홀름의 호텔 에트 헴(Ett Hem), 홍콩국제공항의 캐세이퍼시픽 일등석 라운지, 이케아와 함께 만든 신넬리그(SINNERLIG) 컬렉션이 있다. 2000년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디자인 아카데미(Design Academy Eindhoven)에 '인간과 웰빙(Man and Wellbeing)' 학과를 세워 약 20년간 학생을 가르쳤다. 디자인 공로로 2014년 대영제국훈장 MBE, 2021년 CBE를 받았고,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앱스트랙트: 디자인의 미학》 첫 시즌에 출연하면서 일반에도 이름이 알려졌다.

약력·연혁

1962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선데이 타임스》의 경제 담당 편집자였고, 어머니는 화가이자 피아니스트였다. 어린 시절을 노팅힐에서 보냈고, 가족이 켄트의 낡은 사제관으로 옮긴 뒤 그 집의 방과 복도가 훗날 작업에 영향을 줬다고 말한다.

원래 요크 대학교 진학을 계획했으나, 열여덟에 어머니가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면서 진로를 바꿨다. 런던의 베드퍼드 칼리지(Bedford College, 현 로열 홀러웨이)에 들어가 역사를 전공했다. 졸업 뒤 건축사무소와 건축 잡지 《아키텍츠 저널》에서 일했고, 인테리어 잡지 《월드 오브 인테리어스》를 거쳤다.

1989년, 스물일곱에 영국판 《엘르 데코레이션》 창간 편집장을 맡았다. 꾸밈을 덜어낸 현대적이면서도 실제로 살 수 있는 집을 다루는 편집 노선으로 영국 디자인계에서 주목받았다. 이후 단명한 잡지 《BARE》를 잠시 이끌었다.

1998년 무렵 뉴욕으로 건너가 도나 카란 홈(Donna Karan Home)의 가정용품 부문을 이끌었다. 2000년에는 네덜란드로 가 아인트호벤 디자인 아카데미에 '인간과 웰빙' 학과를 세웠다. 디자인 트렌드 예측가 리 에델코트(Li Edelkoort)의 제안으로 신설 과정을 맡았고, 2019년 물러날 때까지 약 20년간 학과장을 지냈다.

2003년 런던에 자신의 스튜디오일세를 열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건축가, 제품 디자이너뿐 아니라 전략가와 글 쓰는 사람까지 한 팀으로 두고, 인테리어·가구·브랜드 작업을 함께 한다. 작업실은 런던 버몬지(Bermondsey)의 옛 가죽 공장 건물에 있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크로포드는 공간을 설계할 때 그 안에서 사람이 무엇을 만지고, 어떤 빛을 받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먼저 따진다. 모양을 정하기 전에 쓰임을 정하지만, 완성된 실내가 그 계산을 겉으로 내비치지 않게 한다. 그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건축가와 다른 눈으로 건물을 본다고 말한다. 건축가가 외관과 도시 속 건물의 자리를 본다면,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사람이 실제로 머무는 안쪽을 본다는 것이다.

소재 선택이 작업의 출발점이다. 코르크, 오크, 가죽, 리넨, 해초(seagrass), 대나무처럼 손에 닿는 느낌이 좋은 자연 소재를 즐겨 쓴다. 색은 흙빛의 차분한 톤으로 맞추고, 따뜻한 소재와 차가운 소재를 함께 둬 만졌을 때의 온도 차를 만든다. 자연광을 최대한 들이고, 시간에 따라 빛이 바뀌도록 창을 크게 연다.

가구는 작은 치수까지 따져 만든다. 크로포드는 단 3인치(약 7.6cm) 차이로 의자에 앉았을 때의 편안함이 갈린다고 말한다. 마음에 드는 기성 제품을 찾지 못해 직접 가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공간은 손님이 자기 식으로 바꿔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너무 완벽해서 손댈 수 없는 공간을 싫어하고, 낮에는 책상으로 밤에는 식탁으로 쓰는 식의 가구를 선호한다. 수납에도 까다롭다. 집의 최소 15%는 수납에 내줘야 하며, 부엌 찬장은 안쪽 물건을 꺼내 쓰기 어려워 쓸모가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눈에 보이는 물건만 실제로 쓰게 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다.

주요 작업

크로포드의 인테리어 작업은 1998년 영국 서머싯의 컨트리 호텔 배빙턴 하우스(Babington House)에서 시작됐다. 소호하우스 창업자 닉 존스(Nick Jones)와 함께 18세기 저택을 고치면서 호텔·클럽 같은 접객 공간 작업에 발을 들였다. 2001년에는 노팅힐의 일렉트릭 시네마(Electric Cinema)를 고쳤다.

2003년에는 뉴욕 미트패킹 디스트릭트(Meatpacking District)의 옛 공장 건물을 소호하우스(Soho House) 회원제 클럽으로 바꿨다. 4만 5천 제곱피트 건물의 외벽과 뼈대는 살리고, 안을 객실·식당·바·시사실·옥상 수영장으로 채웠다. 이 작업으로 소호하우스 특유의 편안하고 꾸밈없는 분위기를 만든 디자이너로 평가받는다.

2008년에는 런던 첫 이솝(Aesop) 매장을 꾸몄다. 오래된 건물의 옛 모습을 살리면서, 매장 안에 큰 세면대를 둬 매일 피부를 돌보라는 브랜드의 메시지를 공간으로 옮겼다. 이후 코펜하겐 등 여러 이솝 매장을 이어서 디자인했다.

2012년 스톡홀름에서 에트 헴(Ett Hem)을 완성했다. '에트 헴'은 스웨덴어로 '하나의 집'이라는 뜻이다. 100년 된 아츠 앤드 크래프츠(Arts and Crafts, 미술공예) 양식 주택을 객실 열두 개짜리 작은 호텔로 바꾸면서, 직원과 손님을 가르는 프런트 같은 공간을 없애고 손님이 남의 집이 아니라 자기 집처럼 머물게 했다. 손님이 들어왔을 때보다 나갈 때 더 나아진 기분이 들게 한다는 것이 작업의 목표였다.

2013년에는 홍콩의 아트 클럽 겸 레스토랑 더델스(Duddell's)를 맡았다. 상하이 탕 플래그십 위 3·4층 약 1만 제곱피트를 쓰면서, 두 층을 은빛 트래버틴(travertine) 계단으로 잇고 미술품 수집가의 집처럼 꾸몄다. 이듬해에는 스위스 가구 회사 비트라(Vitra)가 독일 바일암라인에 둔 전시 건물 비트라하우스(VitraHaus)의 한 층을 고쳤다. 핀란드 브랜드 아르텍(Artek)과 비트라의 가구를 가상의 부부가 사는 집처럼 섞어 배치했는데, 2013년 비트라가 아르텍을 인수하면서 두 브랜드를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다.

2015년 홍콩국제공항에 캐세이퍼시픽 일등석 라운지 더 피어(The Pier)를 완성했다. 건강·편안함·사생활 보호를 기준으로 삼아, 공항 라운지를 집처럼 꾸민 대표 사례다. 따뜻한 나무와 부드러운 조명, 집에서 쓸 법한 가구를 써서 지하 공간인데도 답답하지 않게 했다. 이듬해 같은 공항에 비즈니스 라운지도 만들었다. 2017년에는 런던에서 셰프 마시모 보투라(Massimo Bottura)가 노숙인에게 음식을 내는 공동체 식당 레페토리오 펠릭스(Refettorio Felix) 인테리어를 맡았다.

가구·제품 작업도 꾸준히 했다. 2010년 데 라 에스파다(De La Espada)와 투게더 테이블(Together Table)을 비롯한 가구를, 2014년 조지 스미스(George Smith)와 일세 소파(Ilse Sofa)를 냈다. 2015년 이케아와 만든 신넬리그(SINNERLIG)는 코르크·도자기·유리·해초·대나무로 만든 가구·조명·식기 약 30종으로, 손에 닿는 느낌과 실용을 함께 노렸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펜던트 조명은 접어서 부피를 줄일 수 있게 설계됐고, 출시 뒤 전 세계에서 널리 팔리며 이케아의 대표 제품으로 남았다. 이케아와는 2021년 장기 협업을 다시 맺었다. 그 밖에 아르티포트(Artifort)의 퍼칭(Perching) 스툴(2016), 자나트(Zanat)의 터치(Touch) 컬렉션(2017), 나니마르키나(Nanimarquina)의 웰빙(Wellbeing) 러그(2019), 베스트베리(Wästberg)의 조명 등을 디자인했다.

세 권의 책도 썼다. 《더 센슈얼 홈(The Sensual Home)》(1997), 《홈 이즈 웨어 더 하트 이즈?(Home Is Where the Heart Is?)》(2005), 《어 프레임 포 라이프(A Frame for Life)》(2014)다.

영향 관계

크로포드의 작업 방식은 잡지 편집자 시절에 자리 잡았다. 여러 집을 취재하면서 어떤 공간이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어떤 공간이 사람을 기계처럼 움직이게 하는지 관찰했고, 이 관찰을 인간 행동에 대한 연구로 이어 첫 책 《더 센슈얼 홈》을 썼다. 북유럽 디자인의 차분한 색과 자연 소재, 아츠 앤드 크래프츠의 수공예 전통이 그녀의 소재 선택에 남아 있다.

크로포드는 20년간 학생을 가르치며 다음 세대 디자이너에게 영향을 미쳤다. 2000년부터 2019년까지 아인트호벤 디자인 아카데미 '인간과 웰빙' 학과를 이끌며, 디자인을 보기 좋은 물건 만들기가 아니라 사람의 실제 필요를 푸는 일로 가르쳤다. 학생들은 의자의 인체공학 같은 익숙한 주제에 머물지 않았다. 한 예로, 네덜란드 의료 체계가 생존 가능 기준으로 삼은 임신 24주를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기를 위해 작은 관을 만든 학생도 있었다.

2016년 메종 오브제(Maison&Objet)가 올해의 디자이너로 그녀를 뽑았을 때, 크로포드는 신진 디자이너로 폴란드 출신 마르친 루사크(Marcin Rusak)를 지목했다. 그녀가 다듬은 따뜻한 소재와 차분한 색, 집 같은 분위기는 2010년대 부티크 호텔과 회원제 클럽, 공항 라운지, 매장 디자인에서 널리 따라 쓰이는 방식이 됐다.

수상·전시 이력

디자인 공로로 영국 정부 훈장을 두 차례 받았다. 2014년 대영제국훈장 MBE, 2021년 한 단계 높은 CBE를 받았다. 영국 왕립예술협회(RSA)가 주는 왕립 산업 디자이너(Royal Designer for Industry, RDI) 칭호도 갖고 있다.

2015년 스톡홀름 가구·조명 박람회(Stockholm Furniture & Light Fair)의 올해의 초청 디자이너(Guest of Honour)로 뽑혀 박람회장 입구 라운지를 디자인했다. 2016년에는 메종 오브제 파리의 올해의 디자이너로 선정돼 디자이너스 스튜디오 공간을 꾸몄고, 같은 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아인트호벤 학생들과 '촉각'을 주제로 한 전시를 큐레이팅했다.

반응과 평가

위상과 영향

크로포드는 인테리어 디자인을 건축에 딸린 장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해 온 디자이너로 꼽힌다. 잡지 편집장에서 출발해 호텔과 클럽, 공항 라운지, 매장, 가구와 조명까지 폭넓게 다뤘다. 이케아 신넬리그의 대나무 펜던트 조명은 전 세계 가정에서 흔히 보일 만큼 퍼졌다. 2017년 넷플릭스 《앱스트랙트: 디자인의 미학》 첫 시즌에 출연한 뒤로는 디자인계 밖의 일반 독자에게도 알려졌고, 한국에서도 이 다큐멘터리를 계기로 그녀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 '웰빙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말은 이후 접객 공간과 인테리어 전반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 됐다.

디자인 반응

크로포드의 따뜻하고 촉각적인 인테리어를 두고 평가가 갈린다. 한쪽에서는 차갑고 빈 미니멀리즘에 대한 대안으로,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인간적인 공간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쪽에서는 흙빛 색과 자연 소재, 집 같은 분위기라는 그녀의 방식이 워낙 자주 따라 쓰이면서, 이제는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공식처럼 느껴진다고 본다. 캐세이퍼시픽 라운지가 어디서나 알아볼 수 있는 디자인으로 꼽히는 것도, 뚜렷한 개성인 동시에 반복이라는 양면으로 읽힌다.

비판

크로포드가 즐겨 쓰는 '웰빙', '감각', '편안함' 같은 말이 모호하고 듣기 좋은 수사에 그친다는 지적이 있다. 크로포드 자신도 이케아 협업을 설명하며 이런 말이 솜털처럼 가볍게 들릴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제품의 쓰임과 치수를 일일이 따지는 까다로운 작업이라고 덧붙인 바 있다.

그녀가 다듬은 따뜻한 자연 소재와 차분한 색이 2010년대 이후 너무 흔해지면서, 정작 그녀의 작업이 더는 새롭게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다.

사람의 보편적 필요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그녀의 주장과 달리, 실제 작업의 상당수가 회원제 클럽, 일등석 라운지, 고급 호텔, 부유층 주택처럼 일부만 누리는 공간에 집중돼 있다는 점도 거론된다. 다만 노숙인을 위한 공동체 식당 레페토리오 펠릭스처럼, 일부가 아니라 더 넓은 사람들을 위한 작업도 있어, 이 비판이 그녀의 작업 전부를 설명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