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비달 (Gilles Vidal)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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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질 비달은 푸조와 르노의 디자인 혁신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프랑스 자동차 디자인의 르네상스를 이끈 디자이너다. 1996년 시트로엥을 시작으로 푸조 디자인 디렉터, 르노 브랜드 디자인 총괄을 역임했다. 2025년 10월부터는 스텔란티스의 유럽 브랜드(푸조, 시트로엥, 오펠, 피아트, 란치아, DS 등) 전체의 디자인 전략을 랄프 질과 함께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의 특기는 과거 모델을 고스란히 베끼는 노골적인 복고(Retro)를 피하면서도 브랜드의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탄생시키는 데 있다. 푸조 e-레전드 콘셉트에서는 504 쿠페의 비례를, 르노 5 E-Tech 일렉트릭에서는 옛 모델의 보닛 환기구를 전기차 충전 표시등으로 영리하게 바꿨다.

또한 껍데기만 그리는 스타일리스트에 머물지 않는다. 르노 시절에는 웰컴 사운드와 보행자 경고음까지 전자음악가 장 미셸 자르와 함께 개발하며 차체, 실내, 그래픽, 소리를 모두 아우르는 브랜드의 총체적 경험을 설계했다.

약력·연혁

선행 디자인으로 다진 기틀

스위스 아트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 졸업 후 1996년 PSA그룹 시트로엥에 입사했다. 외장과 실내 실무를 거쳐 C4 등의 프로젝트를 맡았고, 곧 콘셉트카와 선행 디자인 조직을 이끌게 되었다. 개별 차종을 그리는 실무자에서 벗어나 브랜드 전체가 나아갈 조형적 방향성을 기획하는 시야를 길렀다.

푸조의 부활을 이끈 2010년대

2010년 푸조 디자인 디렉터에 오르며 본격적인 체질 개선을 시작했다. 208, 308, 3008, 508로 이어지는 세대교체를 이끌며, 멍청하게 벌어졌던 큰 램프와 거대한 그릴을 잘라내고 차체 면과 램프 그래픽을 날렵하게 조율했다. 특히 2세대 3008을 통해 작은 스티어링 휠과 높은 디지털 계기판으로 구성된 'i-Cockpit'을 푸조의 아이덴티티로 완전히 정착시켰다.

르노의 르네상스, 뉴 웨이브

2020년 말 르노그룹으로 자리를 옮긴 비달은, 합류 직후 새 로장주 로고와 르노 5 프로토타입을 연달아 터뜨렸다. 과거 바자렐리 시대의 로고를 두 줄 구조로 단순화하고 옛 르노 5 해치백의 유산을 전기차 시대에 맞게 재편했다. 라팔, 세닉 E-Tech 일렉트릭 등 르노의 새로운 굵직한 라인업이 그의 지휘 아래 탄생했다.

스텔란티스로의 거대한 귀환

2025년 10월, 그는 시트로엥과 푸조 시절의 친정 격인 스텔란티스의 유럽 브랜드 디자인 총괄로 복귀했다. 이제는 단일 브랜드를 넘어 여러 브랜드가 각자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조율하는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체제에서 완전히 새로 개발된 차종을 판단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옛 기억을 훔쳐 새 기능에 입히는 기술

과거의 낡은 형태를 억지로 되살리기보다 대중이 어렴풋이 기억하는 특징만 뽑아내 최신 기술에 입힌다. 르노 5의 옛 보닛 환기구 자리에 배터리 충전량을 띄우는 숫자 5 그래픽을 넣거나 윙크하는 듯한 LED 시퀀스로 헤드램프를 꾸민 것이 대표적이다.

날카로운 선과 둥근 볼륨의 대비

르노 시절의 세닉이나 라팔을 보면 차체의 덩어리는 부드럽고 빵빵하게 부풀리되 램프, 그릴, 캐릭터 라인은 칼로 베어낸 듯 날카롭게 깎아냈다. 차 전체를 각지게 만들거나 무작정 둥글리기보다 덩어리와 작은 그래픽의 성격을 분리하는 방식이다.

뼈대부터 다시 잡는 비례

단순히 그릴 디자인만 바꾸는 페이스리프트식 화장을 혐오한다. 푸조 508에서 기존 중형 세단의 보수적인 비례를 버리고 지붕을 낮게 깎은 패스트백 형태로 뼈대부터 다시 세우거나 3008을 높은 벨트라인과 짧은 오버행의 공격적인 SUV로 탈바꿈시킨 것이 그 예다.

소리와 화면까지 아우르는 UX 설계

자동차 디자인을 외장 철판과 실내 가죽으로만 끝내지 않는다. 계기판의 디지털 화면 구성, 차에 탈 때 들리는 웰컴 사운드, 저속 주행 시 울리는 가상 엔진음까지 모두 브랜드가 전달해야 할 디자인 요소로 다룬다.

주요 작업

르노 5 E-Tech 일렉트릭 (2024)

비달이 르노에서 구축한 방향성을 가장 폭발적으로 입증한 대중형 전기차다. 1970년대 오리지널 르노 5의 짧은 덩치와 세로형 테일램프를 계승하면서도 전기차 전용 플랫폼의 늘씬한 휠베이스를 결합했다. 윙크하는 헤드램프, 보닛의 충전량 표시등 등 옛 향수를 위트 있는 최신 기능으로 바꿔냈다.

르노 라팔 (2024)

비달이 르노에 합류해 뼈대부터 온전히 새롭게 빚어낸 첫 양산형 중형 SUV다. 지붕이 낮게 떨어지는 쿠페형 실루엣과 근육질의 넓은 펜더를 조합해 기존 르노 차량들보다 훨씬 공격적이고 넓어 보이는 자세(Stance)를 완성했다. 각도에 따라 패턴이 달라 보이는 전면 그릴 역시 핵심 포인트로 2024년 프랑스 대통령 공식 차량으로 채택되었다.

푸조 e-레전드 콘셉트 (2018)

명차 푸조 504 쿠페를 밑그림 삼아 자율주행 전기차로 재탄생시킨 콘셉트카. 각지고 긴 보닛과 얇은 캐빈 등 고전적인 쿠페의 비례를 고스란히 가져오면서도 거대한 디스플레이와 새로운 실내 구조로 미래를 엮어냈다. 옛 차를 가장 훌륭하게 현대화한 콘셉트카로 꼽힌다.

푸조 508 (2018, 2세대)

보수적인 유럽 패밀리 세단의 틀을 부수고 전고를 한껏 낮춘 5도어 패스트백 스타일로 돌변했다. 창틀 없는 프레임리스 도어와 강렬한 세로형 주간주행등(사자의 송곳니)을 박아 넣어 푸조 세단 디자인의 반란을 보여준 모델이다.

푸조 3008 (2016, 2세대)

외관도 훌륭하지만 비달 체제 푸조 실내 디자인의 심장인 'i-Cockpit'을 완전히 정착시킨 상징적 모델이다. 장난감처럼 작은 스티어링 휠을 아래로 깔고 계기판을 시선 위로 높게 띄웠으며 공조기 버튼을 피아노 건반처럼 나열했다. 화면 터치에만 미쳐가던 자동차 업계에 물리 버튼의 미학을 다시 제시했다.

영향 관계

비달은 특정 브랜드의 유산을 액면 그대로 맹신하지 않고 필요한 기호만 골라내 전혀 다른 뼈대 위에 접붙이는 재능이 탁월하다. 덕분에 시트로엥, 푸조, 르노를 넘나들면서도 각 브랜드의 결과물이 겹치거나 지루해지지 않았다. 과거의 유산을 전기차 시대에 재활용하는 그의 '네오 레트로(Neo-Retro)' 방식은 2020년대 이후 전 세계 자동차 업계의 거대한 유행과 궤를 같이한다.

수상·전시 이력

자동차 회사 디자인 조직의 특성상 그가 이끈 팀 전체의 수상 기록으로 남는다. 2016년 푸조 3008은 국제 자동차 페스티벌 실내 디자인 그랑프리를, 2018년과 2019년에는 푸조 508과 e-레전드 콘셉트카가 연달아 가장 아름다운 자동차 부문 등을 석권했다. 비달은 당시 푸조 디자인 책임자 자격으로 팀을 대표해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반응과 평가

푸조의 화려한 2010년대와 르노의 감각적인 2020년대를 모두 성공적으로 지휘한 프랑스 자동차 디자인의 입지전적 인물이다. 옛 자동차를 그대로 부풀리는 대신 윙크하는 램프나 숫자 그래픽 등 위트 있는 신기술로 둔갑시키는 영리한 감각은 시장의 뜨거운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성공적인 복고 실험은 역설적인 압박을 낳는다. 르노 5, 르노 4처럼 자꾸 과거의 무덤에서 옛 차 이름표를 파내오다 보면 브랜드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대신 과거의 아카이브에만 갇힐 수 있다는 우려도 공존한다. 푸조의 자랑이었던 i-Cockpit의 작은 스티어링 휠 역시 운전자의 체형에 따라 계기판을 다 가려버리는 치명적 구조로 10년 내내 실용성 논란을 빚기도 했다.

최근 비달은 화면의 인터페이스와 가상 엔진음까지 디자인하며 역할의 범위를 걷잡을 수 없이 넓히고 있다. 하지만 자동차 디자인은 수백 명의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수년간 싸워 얻어내는 치열한 집단 공정의 결과다. 이 거대한 조직의 성취가 '비달'이라는 스타 디자이너 1인의 영광으로 축소 포장되는 현상은 자동차 디자인 산업이 마주한 근원적 맹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