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오 만초니 (Flavio Manzoni)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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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oush Abrar

플라비오 만초니(Flavio Manzoni)는 2010년부터 이탈리아 최상위 스포츠카 브랜드 페라리(Ferrari)의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는 자동차 디자이너다. 수십 년간 외부 카로체리아인 피닌파리나(Pininfarina)에 의존하던 페라리의 차체 디자인 개발 체계를 사내 독립 디자인센터 중심으로 완벽히 이관시킨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의 부임 이후 페라리의 디자인 과정은 껍데기(스타일링)와 공기역학(에어로다이내믹)을 별개로 다루던 관행에서 벗어났다. 냉각 공기의 흐름, 하이브리드 배터리의 위치, 운전자의 시팅 포지션을 초기 단계부터 엔지니어와 함께 조율하며, 차체의 공기흡입구나 플라잉 버트레스 같은 요소가 단순한 장식이 아닌 차량의 뼈대와 볼륨 자체를 형성하는 '기능적 조각'으로 거듭났다.

만초니 체제의 페라리는 전 라인업에 획일적인 패밀리룩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이퍼카 라페라리는 노출된 탄소섬유와 날카로운 공력 장치를 뽐내고, 로마는 1950년대 그랜드 투어러의 우아함을 매끈한 곡면으로 부활시켰다. 브랜드 최초의 4도어 푸로산게는 전형적인 SUV의 둔탁한 비례를 거부했으며, 12칠린드리는 고전 명차 데이토나의 검은 전면부를 미래적인 램프 패널로 재해석했다.

2026년 발표된 브랜드 최초의 양산 전기차 '루체(Luce)'는 전 애플 최고디자인책임자 조니 아이브(Jony Ive)가 이끄는 디자인 펌 러브프롬(LoveFrom)과 협업하여 완성한 프로젝트로, 만초니의 페라리 디자인 조직이 차량의 물리적 비례를 잡고 외부 팀이 실내 인터페이스의 혁신을 담당하며 다가올 전동화 시대 페라리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약력·연혁

1965년 이탈리아 사르데냐에서 태어난 만초니는 피렌체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자동차뿐 아니라 건축, 가구, 예술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이 시기의 훈련은 훗날 차체를 단순한 이동 수단의 외피가 아닌 공간과 빛이 교차하는 구조물로 다루는 밑거름이 됐다.

1993년 란치아(Lancia) 디자인센터에 합류하며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가죽과 목재 등 이탈리아 가구의 질감을 자동차 실내에 공간적으로 융합하는 실험을 전개했다. 2001년 세아트를 거쳐 피아트그룹으로 복귀한 뒤 피아트 500의 성공적인 현대적 부활을 이끌었고, 2007년 폭스바겐그룹 크리에이티브 디자인 디렉터로 부임해 부가티, 벤틀리 등 이질적인 브랜드들의 디자인 방향성을 통합 조율하는 거시적 안목을 길렀다.

2010년 페라리 디자인 총괄로 부임하며 그의 진가가 발휘됐다. 외부 스튜디오인 피닌파리나와의 연결고리에 불과했던 사내 조직을 마라넬로 본사 내 강력한 독립 '페라리 디자인센터'로 재편했다. 외장, 실내, CMF(컬러·소재), 공력 엔지니어링 부서를 한데 묶어 라페라리, 488 GTB, SF90 스트라달레 등 브랜드의 상징적인 하이퍼카와 미드십 라인업의 내재화를 이끌었다. 2018년 새 디자인센터 신사옥 건립과 아이코나(Icona) 시리즈 론칭을 통해 브랜드 헤리티지의 성공적인 현대화를 이룩했으며, 2026년 외부 조직인 러브프롬과의 협업으로 브랜드 첫 전기차 루체를 선보이며 현역 최장수 슈퍼카 디자인 수장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디자인 철학·언어

공기역학과 디자인의 구조적 통합

차체 겉면에 날개나 스포일러를 덧붙이는 방식 대신, 공기가 흘러갈 길을 먼저 내어주고 그 주변의 볼륨을 조각한다. 보닛 위로 공기를 넘기는 에어로 브리지, 도어 틈새의 공기흡입구 등은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맹렬한 공기의 흐름이 차량의 측면과 펜더의 입체적 형태를 직접 파내는 '기능적 뼈대' 역할을 수행한다.

획일적 패밀리룩의 거부와 차종별 독창성

모든 모델에 동일한 헤드램프나 그릴을 이식하는 기계적인 패밀리룩을 배척한다. 하이브리드 미드십, 프런트 엔진 GT, 4도어 등 각 차량의 뼈대(엔진 위치 및 패키징)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춰 완전히 다른 얼굴을 부여한다. 단, 짧은 오버행, 강력한 뒤 펜더 볼륨, 노골적인 공기 통로 등 페라리 고유의 역동적 스탠스만을 유전자처럼 공유하게 만든다.

과거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헤리티지

과거 명차의 그릴이나 램프 형태를 일차원적으로 복제하지 않는다. 12칠린드리가 365 데이토나의 아크릴 커버 느낌을 블랙 패널과 얇은 LED로 치환한 것처럼, 과거의 기억에 남는 파편적 특징과 비례감만을 추출해 현대의 공기역학 및 소재 기술로 날카롭게 재조립한다.

기계적 긴장감과 조각적 볼륨의 대비

페라리의 차체는 유려한 덩어리로만 끝나지 않는다.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펜더 곡면 사이에 날카로운 검은색 탄소섬유 패널이나 얇고 예리한 조명 슬롯을 끼워 넣어 차체를 시각적으로 절개한다. 전통적인 스포츠카의 우아한 근육(차체 표면)과 미래적인 기계 장치(블랙 파츠)가 강렬하게 대비되며 시각적 긴장감을 유발한다.

주요 작업

페라리 루체

페라리 루체(Ferrari Luce, 2026)는 브랜드 최초의 양산 전기차이자 첫 5인승 모델이다. 내연기관의 상징인 거대한 그릴이나 배기구를 억지로 흉내 내지 않고, 전기 플랫폼이 요구하는 새로운 공간 비례와 공력 구조를 대담하게 채택했다. 애플 출신의 러브프롬과 협업하여 디스플레이 중심의 획일적인 인테리어를 탈피하고 촉각적인 물리 조작부를 배치해, 전동화 시대 하이퍼카의 새로운 인터페이스 기준을 제시했다.

페라리 F80

페라리 F80(Ferrari F80, 2024)은 라페라리의 계보를 잇는 최상위 한정 생산 하이퍼카다. 유려한 조각품이라기보다 거대한 공력 장치와 뼈대가 앙상하게 드러난 르망 레이싱 프로토타입에 가까운 과격한 형태를 띤다. 램프와 공기 통로를 묶어버린 검은색 바이저 패널이 압도적인 미래성을 뿜어내지만, 다소 장난감 같고 지나치게 기계적이라는 양가적 평가를 받았다.

페라리 12칠린드리

페라리 12칠린드리(Ferrari 12Cilindri, 2024)는 자연흡기 V12 엔진을 전면에 얹은 2인승 베를리네타다. 복잡한 캐릭터 라인을 덜어내고 긴 보닛과 간결한 측면으로 우아함을 되찾았다. 특히 전면의 블랙 패널은 과거 365 GTB/4 데이토나의 오마주이면서도 현대적인 LED 그래픽과 결합되어, 만초니 체제의 가장 세련된 헤리티지 재해석으로 평가받는다.

페라리 푸로산게

페라리 푸로산게(Ferrari Purosangue, 2022)는 페라리 최초의 4도어 모델이다. SUV라는 명칭을 거부하듯, 긴 보닛과 뒤로 바짝 물러난 캐빈을 통해 전통적인 앞엔진 스포츠카의 역동적 스탠스를 유지했다. 2열 문이 역방향으로 열리는 리어 힌지(코치 도어) 방식을 적용해 측면에서 완벽한 2도어 쿠페의 우아한 비율을 구현해 냈다.

페라리 데이토나 SP3

페라리 데이토나 SP3(Ferrari Daytona SP3, 2021)는 1960년대 르망 레이스를 제패한 프로토타입 경주차들을 기리는 한정판 아이코나(Icona) 모델이다. 과거의 구체적인 디테일 복사 대신, 몸에 딱 붙는 좁은 캐빈과 극단적으로 부풀어 오른 펜더, 후면부를 덮은 수평 핀 그래픽을 통해 과거 레이싱카 특유의 거칠고 압도적인 비례감을 현대 기술로 훌륭하게 부활시켰다.

페라리 296 GTB

페라리 296 GTB(Ferrari 296 GTB, 2021)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시스템을 얹은 V6 미드십 스포츠카다. 기존 V8 라인업 대비 휠베이스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캐빈을 앞당겨 작고 민첩한 비례를 완성했다. 시각을 방해하는 측면 공기흡입구를 도어와 펜더 사이 깊은 홈으로 매끄럽게 숨겨, 과거 250 LM 모델의 클래식한 실루엣을 하이브리드 패키징 위에 우아하게 얹어냈다.

페라리 로마

페라리 로마(Ferrari Roma, 2019)는 1950~60년대 이탈리아 로마의 낭만적인 라이프스타일(라 돌체 비타)을 테마로 한 그랜드 투어러다. 그릴의 테두리를 없애고 차체 표면에 다공성 패턴을 타공한 전면부, 군더더기 없는 측면 곡선 등 최근 페라리 모델 중 가장 절제되고 우아한 조형을 보여주며 과시적인 고성능 이미지를 탈피했다.

페라리 SF90 스트라달레

페라리 SF90 스트라달레(Ferrari SF90 Stradale, 2019)는 브랜드 최초의 양산 하이브리드 하이퍼카다. V8 엔진과 3개의 전기모터, 배터리를 욱여넣으면서도 전고를 바닥에 밀착시킨 쐐기형 실루엣을 완성했다. 실내에는 디지털 계기판과 터치식 스티어링 휠 버튼을 전면 도입하여, 이후 페라리 디지털 인터페이스(HMI)의 명확한 기준점을 세웠다.

페라리 라페라리

페라리 라페라리(LaFerrari, 2013)는 한정 생산된 최초의 하이브리드 하이퍼카이자, 외부 카로체리아(피닌파리나)의 손을 빌리지 않고 사내 페라리 디자인센터가 독자적으로 완성한 첫 플래그십이다. F1 머신의 노즈를 연상시키는 전면부와 날카로운 공기 통로 등, 사내 디자인 조직이 극한의 엔지니어링과 형태를 완벽하게 직조해 낼 수 있음을 입증한 기념비적 모델이다.

영향 관계

피닌파리나로부터의 디자인 독립

수십 년간 페라리의 외주 디자인을 도맡았던 피닌파리나의 거대한 유산을 억지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디자인의 주도권을 마라넬로 본사 내부로 조용하고 완벽하게 가져왔다. 디자이너가 단순히 예쁜 껍데기를 스케치해 넘기는 낡은 관행을 끝내고, 초기 단계부터 사내 공기역학 엔지니어들과 머리를 맞대는 구조를 정착시켰다.

러브프롬(LoveFrom)과의 인터페이스 혁업

2026년 발표된 전기차 '루체' 프로젝트에서 조니 아이브의 러브프롬과 협력하며 이례적인 행보를 보였다. 만초니의 내부 조직이 슈퍼카 본연의 뼈대와 공력을 제어하고, 외부 IT 디자인 스튜디오가 디지털 조작부와 실내 경험(UX)을 주도하는 투트랙 전략을 통해 전동화 시대 자동차 디자인의 영역을 산업·전자제품의 경계까지 확장했다.

수상·전시 이력

플라비오 만초니가 이끄는 페라리 디자인센터는 2019년 글로벌 디자인상인 레드닷 어워드에서 '올해의 디자인팀'으로 선정되며 사내 디자인 조직의 확고한 역량을 세계적으로 공인받았다. 2022년 파리 자동차 페스티벌 디자인 그랑프리 수상, 2024년 푸로산게의 콤파소 도로(Compasso d'Oro) 수상, 2025년 12칠린드리의 카 디자인 어워드 수상 등 단일 모델이 아닌 라인업 전체가 국제 무대에서 예술성과 기술력을 입증받고 있다. 라페라리, 몬자 시리즈, 데이토나 SP3 등은 파리, 제네바 모터쇼를 넘어 유수의 미술관과 콩쿠르 델레강스에서 현대 자동차 조형의 마스터피스로 전시되고 있다.

반응과 평가

만초니는 2010년부터 16년 넘게 페라리의 디자인을 지휘하며 럭셔리 자동차 업계 최장수 수장으로 군림하고 있다. 피닌파리나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사내 디자인센터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공로가 압도적이다. 로마, 12칠린드리, 푸로산게 등 획일적인 패밀리룩을 배제하고 차량의 엔진 위치와 목적에 맞춰 완벽히 차별화된 얼굴을 부여하는 조형적 유연성, 그리고 과거 레이싱카의 파편적 특징만 세련되게 추출하는 아이코나 시리즈의 헤리티지 재해석 능력은 평단과 소비자들의 극찬을 받는다.

반면, 극한의 공기역학 성능과 기술력을 시각적으로 과시하려는 시도가 때로는 전통적인 페라리 특유의 '우아한 볼륨감'을 해친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SF90 스트라달레나 F80 등 최신 모델들의 날카로운 검은색 패널과 복잡하게 뚫린 공력 장치들이 차체의 흐름을 조각내어 다소 산만하고 공격적으로 보인다는 지적이다. 터치식 스티어링 휠 등 운전석의 과도한 디지털화는 스포츠카 본연의 맹렬한 조작 직관성을 저해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특히 최초의 전기차 루체에서 보여준 낯선 비례감은 그가 러브프롬이라는 외부 조직과의 충돌을 어떻게 소화하고, 내연기관의 로망이 거세된 시대에 페라리만의 심미적 정당성을 어떻게 새롭게 구축해 나갈 것인지 거대한 시험대에 오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