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지루 (Eric Giroud)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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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els Ackermann / Lundi13

에릭 지루(Eric Giroud)는 건축을 전공한 뒤 시계 디자인으로 전향한 스위스 출신의 디자이너다. 1998년 자신의 시계 디자인 사무소를 설립한 이래 MB&F, 해리 윈스턴, 바쉐론 콘스탄틴, 티쏘 등 다수의 시계 브랜드와 협업을 이어왔다. 그는 브랜드 내부 전속이 아닌 외부 디자이너로서, 고객사의 추상적인 아이디어나 복잡한 무브먼트 구조를 손목 위의 세밀한 비례와 입체적인 케이스로 치환하는 조율자 역할을 맡는다. 대중에게 그의 이름이 가장 깊게 각인된 곳은 MB&F다. 2007년 첫 모델인 HM1부터 2025년 M.A.D.2에 이르기까지 약 20년간 막시밀리안 뷔세와 긴밀히 교류하며, 파격적인 오롤로지컬 머신부터 원형의 레거시 머신, 대중적인 M.A.D.에디션까지 브랜드의 핵심적인 형태를 빚어냈다.

약력·연혁

스위스 발레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음악, 회화, 건축을 두루 접한 지루는 1989년 자신의 건축 사무소를 열며 공간과 구조를 다루는 실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건축 경기 침체를 겪으며 그래픽, 패키지, 가구, 전자기기 등 산업 디자인 전반으로 영역을 넓혔고, 이 시기에 축적한 작은 사물의 표면 처리와 생산 구조에 대한 이해는 훗날 시계 디자인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1997년 처음으로 시계를 스케치한 그는 이듬해 시계 디자인 사무소를 설립하며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건축 설계의 핵심인 단면도와 모형 제작 방식을 손목시계에 도입해 무브먼트, 케이스 가공, 크리스털의 곡률을 입체적으로 다듬는 고유의 방법론을 세웠다. 그의 디자인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은 피터 스피크마린의 소개로 해리 윈스턴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막시밀리안 뷔세를 만난 순간이다. 뷔세가 MB&F를 창립한 이후, HM1을 시작으로 브랜드의 굵직한 컬렉션을 3차원 외형으로 구현해 냈으며, 2025년에는 자신의 1990년대 클럽 문화 경험을 온전히 투영한 독자적 모델 M.A.D.2를 선보이며 외부 조력자를 넘어선 창작의 주체로서 그 입지를 다졌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단면 중심의 설계와 공간 활용

건축가적 시각을 바탕으로 시계의 평면이 아닌 '단면'을 최우선으로 분석한다. 다이얼과 케이스, 무브먼트의 층위를 세밀하게 나누고, 3차원 모형을 통해 내부의 텅 빈 공간과 외부 부품 간의 간격을 조율한다. 특히 다이얼 전체를 부품으로 빽빽하게 채우지 않고 밸런스 휠 주변이나 케이스 한편을 의도적으로 비워두는데, 이때 발생하는 공간의 깊이와 그림자, 손목이 비치는 범위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디자인 요소로 활용한다.

유연한 조형과 아이디어의 현실화

지루는 자신만의 고정된 조형 스타일을 고집하기보다, 창립자나 워치메이커의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실제 제작 가능한 온전한 물체로 다듬어내는 데 집중한다. 브랜드의 요구 사항과 기계적 한계를 수용하면서도, 내부 메커니즘이 단순히 조립을 덜 마친 부품처럼 보이지 않도록 시각적인 완성도를 부여한다. 전투기, 디지털 주얼리, 우주선 등 프로젝트마다 매번 완전히 다른 형태를 도출해 내며, 복잡하고 난해한 기획을 직관적이고 매력적인 사물로 번역하는 탁월한 유연성을 보여준다.

주요 작업

오롤로지컬 머신 1 (HM1)

2007년 발표된 MB&F와의 첫 장기 협업 모델이다. 뷔세가 스케치한 숫자 8 모양의 뼈대와 중앙 투르비용 구조를 지루가 수백 시간을 들여 실제 3차원 케이스로 완성해 냈다. 여러 층의 곡면을 유려하게 연결해 두 개의 다이얼과 기계 장치를 하나로 묶었으며, 창립자의 기획과 워치메이커의 기술, 그리고 외부 디자이너의 조형이 나란히 결합하는 MB&F 특유의 분업 체계를 세상에 처음 알린 상징적 작업물이다.

오퍼스 9 (Opus 9)

2009년 해리 윈스턴의 의뢰로 장마르크 비더레히트와 협력하여 완성한 제품으로, GPHG 디자인 시계상을 수상했다. 다이얼 위를 도는 바늘 대신, 평행하게 움직이는 두 개의 체인 벨트에 다이아몬드와 가넷을 세팅해 시간을 표시한다. 지루는 이 혁신적이고 긴 기계 장치를 직사각형의 투명한 사파이어 케이스 안에 담아내며 정밀 기계와 화려한 보석이 동시에 돋보이는 모던한 외형을 완성했다.

오롤로지컬 머신 4 선더볼트 (HM4)

전투기와 항공기 엔진에서 영감을 받아 두 개의 원통형 케이스를 나란히 덧댄 기하학적 모델이다. 사파이어 크리스털과 티타늄을 결합한 난해한 조립 구조를 완벽하게 통제하며, 중앙 무브먼트와 양쪽의 표시창을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시계를 손목 위 정면이 아닌 착용자의 시선이 향하는 측면에서 읽어내도록 뷰포인트를 비틀어, 2010년 GPHG 디자인·콘셉트 시계상을 거머쥐었다.

매드 투 (M.A.D.2)

2025년 지루가 자신의 1990년대 클럽 문화와 DJ 경험을 직접 투영해 디자인한 점핑아워 시계다. 턴테이블을 빼닮은 두 개의 원형 표시판, 바이닐 레코드의 동심원 패턴, 테크닉스 턴테이블에서 차용한 측면의 발광 인덱스 등 디자이너 개인의 서사가 짙게 배어 있다. 타인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던 기존의 조력자 역할에서 벗어나 지루 자신의 취향과 감각이 온전히 주연으로 나선 기념비적 모델로, 2025년 GPHG 프티 에귀유상을 수상했다.

영향 관계

지루의 디자인 문법은 시계가 아닌 건축에 빚을 지고 있다. 건축에서 체득한 단면 설계와 모형 제작론은, 복잡한 하이엔드 무브먼트를 비좁은 케이스 안에 입체적이고 안정적으로 구축하는 그만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특히 피터 스피크마린의 소개로 만난 막시밀리안 뷔세와의 협업은 지루의 역량을 만개하게 한 절대적인 축이다. 뷔세의 서사적 기획력을 실현 가능한 조형으로 치환하는 20년의 동행은 오늘날 MB&F의 시각적 정체성을 사실상 완성했다. 아울러 오퍼스 9의 장마르크 비더레히트, 레거시 머신의 스티븐 맥도넬 등 최정상급 엔지니어들과 교류하며 기계와 디자인의 이상적인 균형을 증명했다. 그는 단일 브랜드 소속의 인하우스 디자이너라는 전통적 틀을 깨고, 독립 디자인 스튜디오가 현대 하이엔드 워치메이킹 씬에서 얼마나 주도적이고 유연한 조형적 돌파구가 될 수 있는지를 입증한 선구적인 인물이다.

수상·전시 이력

지루의 탁월한 조형 감각은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PHG)를 비롯한 세계 최고 권위의 무대에서 화려한 수상 실적으로 증명되었다. 2007년 해리 윈스턴 투르비용 글리시에르(컴플리케이션 부문)를 시작으로, 2009년 오퍼스 9(디자인 부문), 2010년 HM4(디자인·콘셉트 부문)로 연달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2012년 LM1의 2관왕 수상을 기점으로 레거시 머신 시리즈의 성공 가도를 열었으며, 2016년 LM 퍼페추얼, 2019년 LM 플라잉T를 거쳐 2022년 LM 시퀀셜 EVO로 영예의 대상인 에귀유 도르까지 석권했다. 2025년에는 직접 기획한 M.A.D.2로 프티 에귀유상을 차지했고, HM6로 레드닷 어워드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를 수상하는 등 브랜드와 형태를 불문하고 최상위권의 평가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반응과 평가

에릭 지루는 2026년 현재까지도 수십여 개의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와 협업을 이어가며 현대 시계 디자인의 최전선에서 활약 중이다. 그의 디자인은 HM4나 HM11처럼 기존의 관습적인 원형 케이스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기하학적이고 복잡한 무브먼트를 마주할 때 그 진가가 폭발한다. 특정한 개인의 시그니처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고, 프로젝트의 성격에 맞춰 완전히 다른 형태의 해답을 제시하는 훌륭한 유연성이 대중과 평단의 찬사를 받는다.

반면, 이러한 카멜레온 같은 특성과 전면에 나서지 않는 '외부 디자이너'라는 포지션 탓에, 제랄드 젠타처럼 대중이 단번에 식별할 수 있는 뚜렷한 조형적 낙인이 부재하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특히 MB&F 세계관 구축에 막대한 기여를 했음에도 스포트라이트가 창립자인 뷔세에게 먼저 집중되거나, 다수의 굵직한 그룹 프로젝트가 비밀 유지 계약에 묶여 있어 디자인사에 남긴 그의 실제 공로를 온전히 추적하기 어렵다는 점은 구조적인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원의 평면적인 아이디어와 난해한 도면을 손목 위의 경이롭고 직관적인 건축물로 쌓아 올리는 지루의 독보적 역량은 현대 독립 워치메이킹 역사에서 결코 누락될 수 없는 묵직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