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란 랜팅크 (Duran Lantink)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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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VIKO/Getty Images

듀란 랜팅크(Duran Lantink)는 샤넬, 디올 등의 하이엔드 피스와 데드스톡을 해체·재조합하고, 신체 일부를 기형적으로 부풀려 인체의 기준을 전복하는 네덜란드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다. 2025년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의 첫 상설 아티스틱 디렉터로 전격 발탁되며 자신의 독립 레이블과 오트 쿠튀르 하우스를 동시에 지휘하고 있다.

그가 주창하는 지속가능성은 차분한 에코백이나 어스 톤(Earth tone)의 얌전한 방식이 아니다. 기성 명품을 과감히 가위로 도려내 로고를 충돌시키고, 폐기된 자재를 신체 위에서 역동적으로 요동치는 조각으로 치환한다. 초기에는 다소 실소를 자아내던 이 기괴한 볼륨은 이내 '왜 여성의 가슴과 남성의 어깨, 그리고 럭셔리 로고가 반드시 특정 형태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약력·연혁

198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태어난 랜팅크는 암스테르담 헤릿 리트펠트 아카데미와 산드베르흐 인스티튜트에서 패션을 수학했다. 학생 시절부터 신소재 개발보다 빈티지와 럭셔리 의류를 해체해 이질적인 브랜드 기호를 한 착장 내에 병합하는 변용 작업에 몰두하며, 업사이클링을 단순한 윤리적 계몽이 아닌 미학적 충돌을 야기하는 디자인 방법론으로 채택했다.

2018년 자넬 모네의 ‘Pynk’ 뮤직비디오 의상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다리 사이가 꽃잎처럼 벌어지는 이 핑크색 팬츠는 여성의 성기를 유쾌하게 은유하며 신체를 주체적인 연대의 상징으로 승화시켰고, 특정 부위를 과장해 사회적 담론을 촉발하는 랜팅크 고유의 화법이 정립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자신의 이름을 건 레이블을 론칭해 2023년 파리 패션위크 공식 캘린더에 입성했으며, 풍선처럼 팽창한 가슴과 엉덩이, 스키웨어와 애니멀 프린트를 교차시킨 버블 실루엣으로 독보적인 인상을 각인시켰다.

2020년 레디 투 웨어 은퇴를 선언하고 객원 디자이너 체제로 전환했던 장 폴 고티에는 2025년 이 릴레이를 종료하고 랜팅크를 하우스의 첫 상설 아티스틱 디렉터로 낙점했다. 10년 만에 부활한 고티에 기성복 런웨이(2026 S/S) 데뷔전에서 그는 마린 스트라이프와 원뿔형 브라 등 아카이브 요소에 자신의 패딩 볼륨을 공격적으로 결합했다. 데뷔 시즌의 다소 산만하다는 비평은 이어진 2026 F/W 기성복과 오트 쿠튀르 쇼에서 말레네 디트리히풍의 정교한 테일러링과 아틀리에 공력을 입증하며 단숨에 반전되었고, 하우스와의 굳건한 미학적 결속력을 증명했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신체의 팽창과 기준의 전복

가슴, 엉덩이, 복부, 어깨 등에 패딩을 채워 인체의 비례를 기형적으로 과장한다. 이 극대화된 부위는 이상적인 굴곡이 아니라 실리콘이나 풍선, 만화 캐릭터에 가깝다. 패션이 신체를 아름답게 보정한다는 관습을 찢어버리고, 볼륨을 비현실적으로 팽창시킴으로써 젠더와 신체를 규정하는 사회적 기준의 허상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하우스 권위의 해체와 재조합

샤넬, 디올, 발렌시아가 등 기성 럭셔리 하우스의 재고를 해체해 단일 피스 안에서 충돌시킨다. 명품의 신성한 아우라를 철저히 물성적 재료로 소모해 권위를 해체하는 동시에, 맹목적인 로고마니아 현상의 욕망을 영리하게 역이용하는 고도의 전위적 수단이다.

업사이클링의 유희와 현실적 모순

지속가능성을 도덕적인 이미지로만 포장하는 것을 경계한다. 폐기된 의류는 환경 보호라는 메시지에 갇히지 않고 과장된 성기와 동물 실루엣 등 패션 본연의 파괴적 유희로 재탄생한다. 단, 피스 단위로 해체하는 이러한 방식은 브랜드 비즈니스가 팽창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데드스톡과 새 원단의 비중을 늘려야만 하는 현실적 한계와 충돌한다.

실소와 불편함의 모호한 경계

런웨이에 등장한 돌출된 의상과 성적 뉘앙스는 1차적으로 관객의 실소를 유발한다. 그러나 이 웃음은 이내 특정 신체를 희화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체를 규격화하는 사회적 시선을 조롱하는 것인지에 대한 묘한 불편함으로 전환된다. 랜팅크의 디자인적 파괴력은 바로 이 모호하고 도발적인 경계선상에서 발현된다.

고티에 트롱프뢰유의 3차원 확장

스승 장 폴 고티에가 프린트(트롱프뢰유)를 통해 젠더와 인체를 속였다면, 랜팅크는 이를 실제 패딩과 돌출된 입체 구조로 확장한다. 평면상의 가슴 프린트가 3D 형태로 돌출되고 원뿔형 브라가 엉덩이로 증식하는 등, 스승의 유머를 과거의 유물로 박제하지 않고 과장된 현대적 인체로 진화시켰다.

주요 작업

장 폴 고티에 2026 F/W 오트 쿠튀르

랜팅크의 첫 고티에 쿠튀르 컬렉션. 루이 14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시대의 궁정 복식, 18세기 가발과 리본을 실험적인 소재와 거대한 볼륨으로 치환했다. 고티에 아카이브의 데드스톡 원단을 튈과 파카에 동원해 본인의 업사이클링 철학을 파리 쿠튀르 아틀리에 공정 내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상징적 런웨이다.

장 폴 고티에 2026 F/W RTW

채찍을 든 말레네 디트리히의 비주얼에서 착안해 '마담 남성성(Madame Masculinity)'을 완벽한 수트 핏으로 구현하며 데뷔 시즌의 산만함을 불식시켰다. 원뿔처럼 솟아오른 어깨와 스커트 전면으로 팽창한 패딩이 단순한 형태적 유희를 넘어 예리한 재단 기술의 산물임을 입증했다.

장 폴 고티에 2026 S/S RTW ‘주니어’

하우스 데뷔작이자 약 10년 만에 부활한 고티에 RTW. 마린 스트라이프, 코르셋 등 하우스의 클래식 코드 위로 가슴과 엉덩이를 패딩으로 부풀리며 기괴하게 비틀었다. 과잉된 농담이라는 혹평도 존재했으나, 안전하고 타협적인 복귀를 전면 거부했다는 점에서 압도적인 인상을 남겼다.

자넬 모네 ‘Pynk’ 팬츠

2018년 자넬 모네의 뮤직비디오 의상. 다리 사이에 푹신한 핑크색 패널을 부착해 다수의 댄서가 만개한 꽃잎과 여성의 성기가 교차하는 시각적 환영을 연출했다. 여성의 신체를 성적 대상화에서 주체적인 연대와 유머의 기제로 격상시키며 랜팅크의 개념적 화법을 전 세계에 알렸다.

듀란 랜팅크 2024 F/W

스키웨어와 스포츠웨어를 신체 변형의 극단적 기제로 활용한 시즌. 패딩의 보온재가 추위 방어라는 기능적 부피를 초과해 가슴과 엉덩이를 비현실적으로 팽창시키며, 모델들을 게임 캐릭터나 마네킹처럼 연출했다. 랜팅크를 상징하는 시그니처 '버블 실루엣'이 공고해진 기점이다.

럭셔리 업사이클링 컬렉션

랜팅크의 초기 철학을 대변하는 2017~2022년의 작업물. 중고 샤넬 재킷, 디올 드레스, 스포츠웨어 등 각 하우스의 로고와 텍스처를 훼손 없이 절반씩 해체해 단일 피스로 봉합했다. 맹목적인 로고마니아를 조명하며 업사이클링을 하이엔드의 희소성을 강화하는 전위적 수단으로 역이용했다.

영향 관계

장 폴 고티에의 유산 계승

랜팅크의 미학적 근간은 인체를 왜곡하는 프린트와 코르셋, 하위문화와 오트 쿠튀르의 믹스 매치 등 장 폴 고티에의 숱한 유산과 궤를 같이한다. 고티에가 그를 후계자로 지목한 것은, 하우스의 전위적인 농담을 아카이브에 박제하지 않고 동시대적 맥락으로 갱신할 최적의 파괴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디자인의 개념적 접근

모교인 암스테르담 리트펠트 아카데미의 훈련은 심미적 결과물보다 도발적인 사회적 질문과 실험 과정을 중시한다. 옷의 형태를 직조하는 기술 못지않게 기성품과 사회적 통념을 파괴하는 네덜란드 디자인 특유의 개념주의가 럭셔리 패션 영역으로 침투한 결과물이다.

퀴어 퍼포먼스와 무대 의상의 확장

자넬 모네의 ‘Pynk’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비욘세, 도자 캣, 빌리 아일리시 등 과감한 무대 페르소나를 구축하는 글로벌 아티스트들이 그의 피스를 적극 채택하고 있다. 젠더와 신체를 단일 규격으로 한정 짓지 않는 퍼포먼스와 결합하며, 그의 의상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도발적인 무대 장치로 기능한다.

수상·전시 이력

랜팅크는 2023년 프랑스 ANDAM 패션 어워드 특별상을 수상하며 파리 패션위크 캘린더 진입을 위한 상업적 교두보를 다졌다. 2024년 LVMH 프라이즈에서 칼 라거펠트상(Karl Lagerfeld Prize)을 수상하며 특유의 과장된 볼륨과 업사이클링 철학을 글로벌 최고 권위의 무대에서 공인받았고, 2025년 인터내셔널 울마크 프라이즈 우승을 통해 생산 인프라까지 확충했다. 이 연이은 압도적 성과를 바탕으로 2025년 장 폴 고티에의 상설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되며 오트 쿠튀르와 레디 투 웨어를 동시에 관장하는 하우스 수장으로 등극했다.

반응과 평가

듀란 랜팅크는 2026년 기준 장 폴 고티에의 전 라인을 통솔하는 동시에 본인 레이블을 전개하며 동시대 패션계에서 가장 도발적이고 문제적인 디렉터로 군림하고 있다. 인체 곡선에 과도하게 조심스러운 시대에 가슴, 엉덩이, 성기를 거대한 조각물로 빚어내며 기성 관념을 유쾌하게 비틀어버리는 그의 룩은, 시각적 명징성이 뚜렷해 소셜 미디어와 글로벌 팝스타들의 무대에서 압도적인 파급력을 낳고 있다. 데뷔 시즌의 엇갈린 평가를 뒤집고 이어지는 기성복과 쿠튀르 무대에서 정교한 재단과 아틀리에 공력을 입증함으로써 상업적이고 안전한 런웨이에 진절머리가 난 평단에 신선한 카타르시스를 안겼다.

반면 런웨이의 해학적 요소가 의복 본연의 퀄리티를 잠식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기형적으로 팽창된 볼륨이 계속 반복될 경우, 신체 규범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보다 특정 체형을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하는 자극적인 코스튬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또한 핵심 정체성인 '업사이클링' 피스의 초고가 정책과 극소량 생산 방식은 필연적으로 '소수만을 위한 희귀 사치품'이라는 윤리적 모순에 직면한다. 하우스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대량의 새 원단 투입이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지속가능성 철학을 상업적 공급망에 어떻게 모순 없이 안착시킬 수 있을지가 여전한 숙제다. 아울러 원뿔형 브라 등 이미 대중에게 박제된 고티에의 아카이브 클리셰를 반복 차용하는 것을 넘어, 현세대 소비자가 열광할 전혀 새로운 하우스 아이콘을 발명해 내는 것이 디렉터 랜팅크가 마주한 궁극적인 시험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