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치퍼필드 (David Chipperfield)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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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mon James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는 건축물이 들어설 도시와 기존 환경의 질서에 순응하며 건물의 크기, 재료, 동선을 정교하게 조율하는 영국 출신의 건축가다. 1953년 런던에서 태어나 킹스턴 스쿨 오브 아트와 런던 건축협회 건축학교(AA 스쿨)에서 수학했으며, 리처드 로저스와 노먼 포스터 사무소를 거쳐 1985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건축사무소를 설립했다. 현재 런던을 비롯해 베를린, 밀라노, 상하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거점으로 글로벌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다.
그의 건축은 과시적인 형태를 지양한다. 벽과 기둥, 개구부를 일정한 규칙으로 배열하고 석재와 콘크리트, 벽돌의 물성과 두께를 묵직하게 드러낸다. 특히 박물관 등 문화시설 설계에 있어 개별 전시실 내부보다 복도와 계단, 홀과 광장 등 도시와 건물을 매개하는 전이 공간에 더 큰 무게를 둔다. 베를린 박물관섬의 노이에스 박물관 복원과 제임스 지몬 갤러리 신축은 옛 건물과 새 구조물의 경계를 절묘하게 다룬 대표적 성취다. 개별 건축의 조형성을 넘어 기존 도시 맥락에 대한 깊은 이해와 건축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2023년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했다.
약력·연혁
치퍼필드는 런던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리처드 로저스와 노먼 포스터 사무소에 몸담으며 영국 하이테크 건축의 정수를 경험했다. 그러나 1985년 런던에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를 설립하며 홀로서기를 시작한 이후에는 기계적 설비의 노출보다 벽과 기둥, 재료 본연의 질서를 중시하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초기 영국 내 대형 프로젝트 수주가 어려웠던 시기,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소규모 상업 및 문화시설을 설계하며 실무를 다졌다. 특히 일본에서 체득한 재료의 절제미와 내외부 풍경의 교차 방식은 훗날 그의 건축 언어에 깊은 자취를 남겼다.
그의 건축 궤적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은 분기점은 베를린 노이에스 박물관 프로젝트다.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을 맹목적으로 복원하거나 현대식으로 완전히 덮지 않고, 상처 입은 흔적조차 역사의 일부로 보존하며 새 부재를 이질감 없이 직조해 냈다. 이 작업을 기점으로 제임스 지몬 갤러리, 신국립미술관 보수 등 베를린의 핵심 문화시설을 연이어 맡으며 보존과 재생 분야의 마스터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밀라노, 상하이 등으로 사무소를 넓히며 신축 미술관뿐 아니라 파리 '모를랑 믹시테 카피탈'처럼 철거 위기에 놓인 오래된 관공서를 복합 시설로 소생시키는 등 도시 재생 영역으로 작업 반경을 꾸준히 확장하고 있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과거의 흔적과 공존하는 보존 방식
보존 프로젝트에서 새 부재를 옛것처럼 위장하지 않는다. 기존 벽돌과 회벽, 파괴의 흔적까지 역사의 지층으로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남기되, 소실된 공간은 형태와 표면 질감이 미세하게 다른 현대적 재료로 채워 넣는다. 노이에스 박물관이 건물이 겪은 상흔의 역사를 투명하게 직시하게 한다면,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신국립미술관 보수 작업에서는 건축가 개인의 자의적 해석을 철저히 배제하고 원형의 구조와 설비를 현대적 기준에 맞춰 묵묵히 복원하는 극도의 절제를 보여준다.
물성의 절제와 정밀한 조형 질서
복잡한 곡면이나 화려한 장식 대신 기둥과 벽의 간격, 바닥과 천장의 묵직한 두께감을 통해 건축의 뼈대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한 프로젝트 내에서 석재, 콘크리트, 목재 등 극히 제한된 재료만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물성 자체의 무게감과 빛의 반사를 조율한다. 취리히 미술관 증축관의 석회암 세로 핀 배열이나 제임스 지몬 갤러리의 정갈한 콜로네이드에서 보듯, 그의 건축은 형태적으로 단순하지만 재료의 접합부와 비례가 한 치라도 어긋나면 전체 질서가 무너지는 고도의 시공 정밀도를 요구한다.
도시 맥락을 매개하는 전이 공간
미술관 등 공공건축의 로비를 단순한 매표 및 통과 구역으로 방치하지 않는다. 제임스 지몬 갤러리의 거대한 계단과 테라스, 취리히 미술관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웅장한 입구 홀은 전시 관람 여부와 무관하게 시민들이 언제든 통과하고 머물 수 있는 입체적인 광장으로 기능한다. 건축물의 내부를 도시의 길거리로 유연하게 확장하여 공공의 동선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데 집중한다.
주요 작업
노이에스 박물관 (2009)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19세기 건축물을 현대적인 박물관으로 소생시킨 기념비적 프로젝트다. 훼손된 벽화와 기둥을 보존하고 소실된 중앙 계단 등 필수 공간은 새 콘크리트와 재생 벽돌로 재건했다. 맹목적인 복원이나 과격한 현대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으며, 여러 시대의 켜를 한 공간에 공존하게 한 현대 보존 건축의 교본으로 평가받는다.
제임스 지몬 갤러리 (2019)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베를린 박물관섬의 새로운 출입구이자 다목적 편의시설이다. 고전주의 건축군 사이에서 시각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높은 기단과 얇고 긴 콜로네이드(기둥 회랑)로 파사드를 구성했다. 거대한 외부 계단을 통해 페르가몬 박물관과 노이에스 박물관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며, 신축 건물이 주변 역사 환경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운 맥락주의 건축의 정수다.
취리히 미술관 증축관 (2020)
기존 미술관 건너편에 신설된 거대한 독립 건물로, 현지 쥐라 석회암으로 빚어낸 규칙적인 세로 핀 입면이 돋보인다. 건물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거대한 중앙 홀을 배치해 도시의 광장과 정원을 잇는 공공 통로로 활용했다. 육중한 매스가 주는 안정감이 탁월하나, 주변 맥락에 비해 스케일이 지나치게 거대하고 권위적이라는 논쟁을 부르기도 했다.
신국립미술관 보수 (2021)
현대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남긴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의 원형을 되살린 프로젝트다. 기존 철골 지붕과 유리 외벽, 화강석 바닥을 세밀하게 해체하고 노후화된 설비와 방수층을 현대적 성능으로 전면 교체한 뒤 재조립했다. 자신의 디자인적 에고(Ego)를 완전히 지우고 건축물의 수리와 성능 개선이라는 보수 본연의 가치에 헌신했다.
모를랑 믹시테 카피탈 (2022)
파리 센강변에 자리한 1960년대 낡은 행정청사를 철거하는 대신 주거, 호텔, 업무, 상업 시설이 섞인 복합 공간으로 재생한 도시 프로젝트다. 기존 고층동과 저층부 사이를 연결하는 새로운 구조물과 전망 통로를 삽입하여, 폐쇄적이었던 관공서 블록을 사방으로 열린 공공의 장소로 환골탈태시켰다.
영향 관계
치퍼필드는 리처드 로저스와 노먼 포스터로 대변되는 영국 하이테크 건축의 세례를 받았으나, 설비와 구조를 장식적으로 노출하는 기계적 방식과는 거리를 두었다. 오히려 초기 일본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체득한 물성의 절제와 내외부 풍경의 관계(차경) 맺기 방식이 그의 근본적인 조형 언어에 더 깊은 토대가 되었다. 특히 노이에스 박물관 이후, 역사적 건축물을 새것처럼 말끔히 복제하는 관행을 깨고 훼손과 치유의 흔적을 켜켜이 남기는 방식은 전 세계 보존 건축 분야에 강력한 화두를 던졌다. 특정한 형태적 스타일을 이식하기보다, 장소성이 지닌 맥락을 면밀히 조사하고 최소한의 필수적인 변화만을 가미하는 태도 자체가 그가 현대 건축계에 남긴 가장 묵직한 유산이다.
수상·전시 이력
2011년 영국왕립건축가협회(RIBA) 로열 골드 메달 수상에 이어, 2013년 다카마쓰노미야 전하기념 세계문화상(건축 부문)을 품에 안았다. 특히 노이에스 박물관 프로젝트로 2011년 유럽 최고 권위의 현대건축상인 미스 반 데어 로에상을 수상하며 보존 건축의 탁월성을 국제적으로 입증했다. 이후 전 세계 주요 박물관 및 공공 프로젝트를 흔들림 없이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2023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거머쥐었다.
반응과 평가
강렬한 조형이나 작가적 스펙터클을 앞세우는 여타 스타 건축가들과 달리, 치퍼필드는 특유의 절제와 순응의 미학으로 국제 공공건축 씬에서 확고한 위상을 굳히고 있다. 철거와 신축 중심의 재개발이 한계에 다다른 현대 도시에서, 노이에스 박물관과 신국립미술관 보수 등을 통해 보여준 그의 건축적 재생 해법은 시대적 요구와 완벽히 맞닿아 있다. 유행을 타지 않는 단정한 평면과 묵직한 물성은 건물이 완공 직후보다 세월이 흐를수록 주변 환경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는 찬사를 받는다.
반면, 거대한 석재 패널과 정밀한 노출 콘크리트를 반복하는 방식이 빚어내는 엄숙함 탓에 공간이 지나치게 차갑고 권위적으로 다가온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또한 장식을 덜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물성 표현을 위해 요구되는 정밀한 시공과 막대한 공사비는 경제적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다. 역사적 맥락과 질서를 우선시하는 그의 태도가 자칫 기존 체제나 고전적 권위에 대한 순응으로 비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건축물이 도시의 배경으로 기꺼이 물러나게 하고 사람과 장소의 본질적인 앙상블을 빚어내는 치퍼필드의 깊고 신중한 시선은, 현대 건축이 나아가야 할 지속 가능한 방향성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