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 라카통 & 장필립 바살 (Anne Lacaton & Jean-Philippe Vassal)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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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 라카통(Anne Lacaton)과 장필립 바살(Jean-Philippe Vassal)은 노후 건물을 철거하는 대신 기존 구조를 보존하고, 그 외곽에 겨울정원과 발코니 같은 가벼운 외피를 덧붙여 거주 면적을 획기적으로 넓히는 프랑스의 건축가 듀오다. 보르도 국립건축학교에서 만나 1987년 라카통 앤 바살을 설립했다.
이들이 설계를 시작할 때 던지는 첫 질문은 '무엇을 새로 지을 것인가'가 아니다. '기존 환경에서 무엇을 남길 수 있으며, 동일한 비용으로 거주자에게 얼마나 더 넓고 밝은 여백을 돌려줄 수 있는가'를 최우선으로 묻는다. 값비싼 마감재 대신 농업용 온실과 폴리카보네이트 패널 등 저렴하고 투명한 산업용 자재를 적극적으로 차용해 실질적인 공간의 크기를 확장한다.
두 사람의 철학은 파리와 보르도 일대의 대규모 사회주택 리노베이션을 통해 가장 극적으로 증명되었다. 낡은 아파트를 부수고 원주민을 내쫓는 재개발의 폭력성을 거부하고, 주민이 거주하는 상태 그대로 건물 바깥에 테라스 구조물을 조립해 채광과 평수를 늘려주는 방식을 취했다. 경제성, 환경, 거주자의 삶의 질을 완벽하게 통합해 낸 공로로 2021년 건축계 최고 영예인 프리츠커 건축상을 공동 수상했다.
약력·연혁
보르도 국립건축학교 졸업 후 바살은 서아프리카 니제르에서 도시계획 실무를 맡았고, 라카통 역시 현지를 오가며 교류했다. 빈약한 자본과 혹독한 기후 속에서도 목재와 직물로 엮어낸 현지의 그늘과 통풍 구조는, 훗날 이들이 비용 대비 공간의 효용성을 극대화하는 실용적 건축관을 정립하는 든든한 자양분이 되었다. 1987년 파리에 사무소를 설립한 이들은 1993년 초기 대표작인 '라타피 주택'을 통해 주거 공간의 절반을 온실로 덮는 파격적인 실험을 선보이며 건축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미술관과 공공시설, 그리고 대규모 주거 리노베이션으로 작업 반경을 크게 확장했다. 팔레 드 도쿄 미술관이나 낭트 건축학교 프로젝트에서는 기존의 거친 구조를 세련되게 치장하지 않고 미완성의 상태로 남겨두어, 사용자가 공간을 자유롭게 점유할 수 있도록 비워두었다. 특히 프레데리크 드뤼오, 크리스토프 위탱 등 동료 건축가들과 연대하여 파리 '투르 부아 르 프레트르', 보르도 '그랑 파르 530가구' 등 대규모 사회주택 재생 프로젝트를 연달아 성공시켰다. 철거의 문턱에 섰던 노후 아파트들은 이들의 외부 증축 해법을 통해 철거 비용보다 훨씬 저렴한 예산으로 생명력을 연장하며 현대 주거 재생의 교본으로 자리 잡았다.
디자인 철학·시그니처
보존과 덧댐의 원칙
이들의 대원칙은 '절대 서둘러 철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면이 낡고 불편하더라도 뼈대가 견고하다면 이를 자산으로 삼는다. 철거와 신축, 폐기물 처리에 매몰될 막대한 비용을 기존 건물의 면적을 늘리고 채광과 환기를 개선하는 데 쏟는다. 이는 탄소 배출을 억제하는 친환경적 선택인 동시에, 오랜 세월 엮인 지역 공동체를 해체하지 않는 가장 윤리적인 건축적 해법이다.
공간의 경제성과 여백의 제공
주어진 예산 안에서 값비싼 자재나 매끈한 디자인을 포기하는 대신, 농업용 온실 등 저렴한 산업용 자재를 활용해 '같은 비용으로 두 배 더 넓은 공간'을 창출한다. 장식을 덜어내어 확보한 예산은 거주자에게 돌아갈 압도적인 물리적 볼륨과 풍부한 햇빛으로 환원된다. 건축가가 용도를 촘촘히 묘사하여 완성을 강요하기보다, 크고 비어있는 여백을 제공해 거주자가 가구와 식물로 일상을 스스로 채우게끔 공간의 권력을 이양한다.
기후에 순응하는 가변적 외피
라카통 앤 바살의 외벽은 콘크리트처럼 고정된 장벽이 아니라, 미닫이문, 폴리카보네이트 패널, 은박 커튼, 차양이 겹겹이 포개진 가변적인 피부다. 거주자가 계절과 일조량에 맞춰 이 막들을 능동적으로 열고 닫으며 온도와 바람을 통제한다. 겨울에는 햇빛을 가두는 완충 공간이 되고, 여름에는 외벽을 활짝 열어 바람 길을 트는 등 자연과 호흡하는 주거의 유연성을 극대화한다.
주요 작업
그랑 파르 530가구 리노베이션 (2017)
보르도에 위치한 1960년대 노후 사회주택 3개 동을 헐지 않고 소생시킨 기념비적 프로젝트다. 건물의 기존 구조를 유지한 채 외부 외곽을 따라 깊이 3.8m의 새로운 겨울정원과 발코니 구조물을 덧붙였다. 옹색했던 거실 창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열리는 대형 유리문으로 교체되어 공간의 깊이가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공기 중 주민 이주 없이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2019년 미스 반 데어 로에상을 수상하며, 철거 중심의 재개발 공식을 뒤집은 완벽한 선례로 기록되었다.
투르 부아 르 프레트르 (2011)
파리 외곽순환도로 변에 자리한 16층 규모, 96가구의 아파트를 재생한 작업이다. 당초 철거가 유력했으나, 외부 증축을 통한 공간 확장을 제안하며 건물의 수명을 극적으로 연장했다. 두꺼운 기존 외벽을 걷어내고 3m 깊이의 겨울정원과 발코니를 새롭게 덧대어 협소했던 세대 면적을 넓히고 채광을 끌어들였다. 엘리베이터 등 코어부까지 정비해 주거 성능을 신축급으로 끌어올렸으며, 주민의 강제 이주를 막아낸 사회적 성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팔레 드 도쿄 (2002/2012)
1930년대 지어진 만국박람회 건물을 현대미술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프로젝트다. 내부의 거친 콘크리트 골조와 뜯겨나간 벽면, 낡은 설비의 흔적을 말끔하게 덮지 않고 고스란히 노출했다. 안전과 기초적인 설비만을 보강한 채 거대한 내부를 미완성 공사장처럼 텅 비워두었다. 이는 한정된 예산에 맞춘 경제적 결정인 동시에, 큐레이터와 작가들이 어떤 크기와 형태의 작품이든 자유롭게 설치하고 개입할 수 있도록 열어둔 의도적인 미학이다.
라타피 주택 (1993)
보르도 외곽에 지어진 185㎡ 규모의 단독주택으로, 저비용 고효율이라는 이들의 건축 지론을 세상에 알린 초기 선언문과도 같다. 단열 처리된 전면의 주거 공간 뒤편으로 농업용 폴리카보네이트 자재를 활용한 같은 크기의 거대한 온실을 덧붙였다. 폴딩 도어를 통해 실내와 온실이 하나의 공간처럼 연결되며, 거주자는 외벽을 자유롭게 개방하며 빛과 바람을 조절한다. 주택에 농업용 설비를 대담하게 들이며 럭셔리의 기준을 재정의한 작업이다.
FRAC 노르파드칼레 (2013)
됭케르크에 남겨진 옛 조선소 창고를 보존해 현대미술 수장고 및 전시 시설로 바꾼 프로젝트다. 어마어마한 부피의 기존 창고를 내부 개조 없이 대형 설치 예술이나 이벤트를 담는 거대한 빈 공간으로 남겨두고, 바로 옆에 완벽히 똑같은 형태와 단면을 가진 반투명한 쌍둥이 건물을 신축해 붙였다. 새 건물에는 수장고와 사무 공간 등 섬세한 프로그램이 들어갔으며, 과거 산업의 유산과 현대적 기능이 투명한 물성을 매개로 병치된 수작이다.
영향 관계
라카통과 바살은 기능적이고 합리적인 구조를 추구했던 근대 모더니즘의 유산을 물려받으면서도, 낡았다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자행되던 모더니즘 주거 단지의 전면 철거 관행에는 단호히 맞섰다. 서아프리카 니제르에서 경험한 빈약한 자원과 기후 순응적 해법은, 화려한 마감재 대신 폴리카보네이트와 철골 등 경량 산업 자재를 건축의 전면으로 끌어들이는 대담한 발상의 기원이 되었다. 프레데리크 드뤼오 등과의 협업을 거치며 단독 주택의 온실 실험은 거대한 사회주택의 외벽 증축으로 진화했다. 철거를 유예하고 외부 테라스를 덧대는 이들의 해법은, 탄소 중립과 주거난에 직면한 현대 유럽 도시 재생 분야에서 가장 강력하고 실효성 있는 대안적 프로토타입으로 자리 잡았다.
수상·전시 이력
2019년 그랑 파르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로 유럽 최고 권위의 미스 반 데어 로에상을 수상하며 건축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2021년 마침내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 건축상을 공동 수상하며 그들의 헌신적인 철학을 세계적으로 공인받았다. 환경과 윤리를 앞세운 행보로 '지속가능한 건축 글로벌 어워드' 등 유럽 전역의 건축상을 휩쓸었으며, 텅 빈 공간의 미학을 극대화한 팔레 드 도쿄와 주거 리노베이션 작업들은 유수의 국제 건축전에서 시대적 지표로 반복 조명되고 있다.
반응과 평가
라카통 앤 바살은 자본의 논리에 기댄 '전면 철거 후 신축'이라는 주류 건설 시장의 폭력성에 가장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실질적인 대안을 증명해 낸 듀오다. 건물의 표면적 가치나 부동산 시세보다,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실제 사용 면적, 햇빛, 삶의 질, 그리고 공동체의 유지가 건축의 진짜 본질임을 일깨웠다. 겨울정원을 덧대는 이들의 직관적인 해법은 건축가 엘리트주의를 내려놓고 거주자에게 공간의 주도권을 돌려준다는 점에서 평단의 극찬을 받는다.
하지만 온실 구조의 치명적인 양면성도 지적된다. 겨울정원은 훌륭한 완충 지대지만 단열이 완벽한 실내와는 거리가 멀어, 혹서기와 혹한기에는 거주자가 차양과 환기를 얼마나 기민하게 제어하느냐에 따라 효용성이 극단적으로 갈린다. 또한, 덧댐 방식은 필연적으로 건물 외부의 여유 부지와 기존 뼈대의 구조적 내구성을 전제로 하므로, 밀도가 한계에 달한 도심이나 안전 등급이 심각한 건물에는 무비판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값싸고 가벼운 폴리카보네이트 자재 역시 변색과 노후화에 취약해 장기적인 유지 보수의 비용 청구서를 남길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거하기 전에 기존 건물이 가진 가능성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의심하고 발굴하라'는 그들의 태도는 무분별한 소비 시대에 건축이 잃지 말아야 할 가장 숭고한 원칙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