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모피즘 (Biomorphism)
개요
바이오모피즘은 식물과 세포, 장기, 뼈, 조개껍데기처럼 살아 있는 것에서 떠올릴 수 있는 형태를 추상적인 곡선과 덩어리로 표현하는 미술·디자인 흐름이다. 자연물을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기 어려우면서도 어딘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형태를 만든다.
정사각형과 원, 직선처럼 기하학적으로 정의하기 쉬운 모양보다 좌우가 조금씩 다르고 계속 부풀거나 오목해지는 자유곡선이 중심이 된다. 20세기 초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에서 강하게 등장했고 이후 가구와 유리, 제품, 건축까지 퍼졌다.
바이오모피즘은 자연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유기적 디자인과 같지는 않다. 유기적 디자인이 재료와 기능, 사람의 몸과 자연환경 사이의 관계까지 다루는 더 넓은 개념이라면 바이오모피즘은 우선 형태가 생명체를 어떻게 떠올리게 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역사·전개
기하학적 추상에 대한 다른 선택
19세기 말 아르누보는 줄기와 잎, 꽃에서 가져온 곡선을 건축과 가구, 그래픽에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식물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 이후 바이오모피즘의 추상적인 덩어리와는 차이가 있다.
1910년대 장 아르프는 신장이나 아메바처럼 보이는 불규칙한 형태를 회화와 부조에 사용했다. 큐비즘과 구성주의가 직선과 기하학으로 화면을 조직하던 것과 전혀 다른 추상 언어였다.
호안 미로와 여러 초현실주의 작가도 사람과 동물, 세포를 정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형태를 발전시켰다. 1930년대에는 이런 형식을 설명하기 위해 `biomorphic`이라는 말이 미술비평과 전시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초현실주의에서 제품으로
초현실주의가 자연과 신체를 변형한 이미지에 관심을 보이면서 바이오모픽 형태는 가구와 오브제로 빠르게 옮겨갔다.
알바 알토의 유리 화병은 완전한 원이나 사각형 대신 물웅덩이나 호수의 윤곽처럼 계속 굽는 외곽선을 사용했다. 이사무 노구치는 조각에서 사용하던 자유곡선을 테이블 상판과 다리에 적용했다.
카를로 몰리노처럼 가구의 구조 자체를 생명체의 움직임처럼 만든 디자이너도 등장했다. 바이오모피즘이 그림의 형태에서 실제 사람이 만지고 사용하는 물건으로 확장된 시기다.
성형 기술과 전후 디자인
합판과 플라스틱, 유리섬유를 원하는 곡면으로 성형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바이오모픽 형태를 대량생산 제품에 적용하기 쉬워졌다.
한 장의 셸이 등과 좌판을 동시에 만드는 의자나 네모난 상판 대신 물방울처럼 휘어진 테이블이 늘었다. 전쟁 이전에는 조각적 실험에 가까웠던 형태가 1950년대 이후 생활가구의 익숙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디지털 곡면의 시대
컴퓨터 모델링과 CNC, 3D 프린팅이 보편화된 뒤에는 손으로 도면을 그리기 어려웠던 복잡한 곡면도 실제 제품과 건축으로 만들 수 있게 됐다.
피터 쿡과 콜린 푸르니에의 쿤스트하우스 그라츠처럼 건물 전체를 생물체에 가까운 덩어리로 만든 사례도 등장했다. 다만 디지털로 만든 곡면이 모두 바이오모픽인 것은 아니다. 형태가 생명체와 자연의 성장·기관·표면을 떠올리게 하는지가 중요한 구분점이다.
디자인 특징·시그니처
중심이 없는 자유곡선
바이오모픽 형태는 원처럼 하나의 중심에서 일정한 거리로 끝나지 않는다. 한쪽이 부풀었다가 다른 쪽에서 좁아지고, 같은 외곽선 안에서도 곡률이 계속 달라진다.
그래서 정지된 물체에서도 자라고 늘어나거나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생긴다.
생명체를 직접 묘사하지 않는 형태
꽃잎이나 동물을 그대로 만드는 것과도 다르다. 무엇을 닮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세포와 장기, 뼈, 조약돌 같은 여러 자연물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형태를 특정 사물에 고정하지 않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각자 다른 연상을 할 수 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부품
제품에서는 상판과 다리, 등받이와 좌판처럼 원래 분리돼 보이던 부품의 경계를 줄이는 경우가 많다.
한 표면이 휘어지며 다른 기능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조립된 기계보다 하나의 몸체처럼 보인다.
재료와 제작기술이 만드는 곡선
바이오모피즘의 확산은 형태만의 역사가 아니다. 곡목과 성형합판, 플라스틱 사출, 유리 성형, 복합재와 디지털 제작기술이 새로운 곡선을 실제 제품으로 만들 수 있게 했다.
자유로운 형태가 가능해질 때마다 바이오모픽 디자인도 다시 등장했다.
주요 사례
장 아르프 《에낙의 눈물》
장 아르프의 《에낙의 눈물》(Enak's Tears, 1917)은 서로 다른 색의 나무판을 신장과 아메바처럼 굽은 형태로 잘라 겹쳤다.
기하학적 추상과 다른 불규칙한 형태를 일찍부터 분명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이후 미로를 비롯한 여러 작가에게 영향을 줬다.
알바 알토 화병
알바 알토 화병(Aalto Vase, 1936)은 하나의 직선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물결 모양의 유리 외곽선으로 만들어졌다.
꽃병이라는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어느 방향을 정면으로 봐야 하는지 정하지 않았다. 바이오모픽 형태가 현대 제품디자인으로 넘어온 대표적인 사례다.
노구치 커피 테이블
이사무 노구치의 커피 테이블(Noguchi Coffee Table, 1944)은 자유곡선 유리 상판과 서로 맞물리는 두 개의 목재 다리만으로 구성된다.
조각에서 사용하던 바이오모픽 형태를 가구 구조로 옮겼지만 실제 테이블의 기능은 잃지 않았다. 조각과 생활제품의 경계를 좁힌 대표작이다.
카를로 몰리노 아라베스크 테이블
카를로 몰리노의 아라베스크 테이블(Arabesque Table, 1949)은 상판과 굽은 목재 구조가 신체의 자세처럼 이어진다.
초현실주의 미술의 자유곡선을 가구로 옮기면서도 목재가 받는 힘과 접합을 함께 해결했다.
쿤스트하우스 그라츠
쿤스트하우스 그라츠(Kunsthaus Graz, 2003)는 피터 쿡과 콜린 푸르니에가 설계한 미술관이다. 역사적인 도시 지붕 사이에 짙은 청색의 부풀어 오른 곡면 건물이 들어섰다.
표면에서 튀어나온 노즐과 유기적인 외피 때문에 현지에서는 `Friendly Alien`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바이오모피즘이 가구와 오브제를 넘어 디지털 설계 시대의 건축으로 확장된 모습을 보여준다.
반응과 평가
위상과 영향
바이오모피즘은 기계 시대의 현대 디자인이 반드시 직선과 직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지속적으로 다른 선택지를 제시했다.
아르프와 미로의 추상미술에서 알토와 노구치의 제품, 현대의 디지털 건축까지 시대마다 다른 제작기술을 통해 반복해서 등장했다.
디자인 반응
곡선이 몸을 감싸는 가구나 손에 닿는 제품에서는 기하학적 형태보다 부드럽고 친근한 인상을 줄 수 있다. 모서리가 적고 방향성이 약해 여러 공간에 놓기 쉬운 경우도 있다.
반면 자유곡선을 많이 사용하면 실제 기능과 무관하게 모든 제품이 비슷한 `블롭` 형태로 수렴할 수 있다.
비판
자연을 참고했다는 설명만으로 복잡한 곡면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가장 큰 약점이다. 생명체를 닮은 외형이 실제로 재료를 덜 쓰거나 사람의 몸에 더 잘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디지털 모델링이 쉬워진 뒤에는 특히 형태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과 그 형태가 필요한 이유를 구분해야 한다. 바이오모피즘의 힘은 곡선 자체보다 그 곡선이 재료와 기능, 제작 방식과 설득력 있게 연결될 때 생긴다.
관련·혼동 용어
유기적 디자인
자연과 사람의 몸, 기능과 재료가 하나의 전체로 연결되는 설계 관점이다. 외형이 생명체를 닮지 않아도 유기적 디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바이오모피즘보다 범위가 넓다.
오가닉 모더니즘
모더니즘의 기능성과 단순함을 유지하면서 목재와 곡면, 몸에 맞는 형태를 결합한 전후 디자인 흐름이다. 바이오모픽 형태를 사용할 수 있지만 둘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아르누보
식물과 꽃, 줄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직접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바이오모피즘은 자연 형태를 더 추상적으로 변형한다.
파라메트릭 디자인
수치와 관계식을 조정해 복잡한 형태를 만드는 설계 방식이다. 결과가 바이오모픽하게 보일 수 있지만 직선적인 파라메트릭 디자인도 가능하다.
같이 보기
초현실주의
유기적 디자인
오가닉 모더니즘
아르누보
파라메트릭 디자인
알바 알토
이사무 노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