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이즘 (Dadaism)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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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이즘(Dadaism)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해 독일, 프랑스, 미국 등으로 퍼진 국제 전위운동이다. 회화나 조각의 새로운 양식을 세우기보다, 무엇을 예술로 인정할지 정해 온 제도와 관습을 흔드는 데 더 큰 힘을 쏟았다. 완성된 작품보다 선택과 행동, 공연과 출판, 우연한 조합을 앞세웠고, 기성품과 신문 사진, 광고 문구, 버려진 종이까지 작업 재료로 끌어들였다.

다다는 흔히 ‘반예술’로 설명된다. 하지만 예술을 없애려 했다는 뜻과는 다르다. 전쟁을 일으킨 정치와 이성 중심의 문명이 예술의 권위까지 독점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출발해, 아름다움과 숙련도, 작가의 독창성만으로 작품을 평가하던 기준을 거부했다. 그 결과 레디메이드, 포토몽타주, 자동기술법(오토마티즘), 퍼포먼스, 아티스트 북, 실험 영화처럼 이후 현대미술과 그래픽 디자인을 바꾼 여러 방법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역사·전개

취리히의 시작

1916년 2월 5일 후고 발과 에미 헤닝스는 취리히 슈피겔가세 1번지에 카바레 볼테르를 열었다. 전쟁을 피해 중립국 스위스로 모인 장 아르프, 트리스탕 차라, 마르셀 얀코, 리하르트 휠젠베크 등이 이곳에서 시 낭송, 음악, 춤, 가면극, 소음 공연을 벌였다. 서로 다른 언어를 섞거나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시를 낭독하면서, 언어가 정치 선전과 민족주의를 전달하는 도구로 굳어지는 상황을 비틀었다.

같은 해 5월에 발행된 소책자 《카바레 볼테르》에는 ‘다다’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다. 다다라는 이름이 어떻게 정해졌는지는 여러 설명이 남아 있지만, 어느 언어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고 뜻을 하나로 고정하기 어렵다는 점 자체가 운동의 성격과 맞았다. 취리히 다다는 작품을 조용히 전시하는 대신 공연장, 인쇄물, 선언문, 낭독회를 오가며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뉴욕과 베를린의 확장

취리히와 비슷한 시기 뉴욕에서는 마르셀 뒤샹, 프랜시스 피카비아, 만 레이가 기성품과 기계 이미지를 이용해 전통적인 작품 개념을 흔들었다. 뒤샹은 자전거 바퀴, 병 건조대, 소변기처럼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선택하고 제목을 붙여 전시함으로써, 작가의 손기술보다 선택과 맥락이 작품을 만든다는 레디메이드 개념을 밀어붙였다. 뉴욕 다다는 취리히처럼 공식 조직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이후 개념미술과 팝아트가 전개될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이 됐다.

전쟁이 끝난 뒤 베를린으로 옮겨간 다다는 훨씬 직접적인 정치성을 띠었다. 라울 하우스만, 한나 회흐, 존 하트필드, 게오르게 그로스는 신문과 잡지에서 오려낸 사진과 글자를 다시 붙여 군국주의, 자본주의, 언론, 성 역할을 공격했다. 1920년 열린 제1회 국제 다다 박람회는 그림, 인쇄물, 조립물, 정치 풍자를 뒤섞어 전시장 자체를 혼란스러운 선전 공간으로 만들었다. 포토몽타주는 이 시기에 단순한 화면 구성 기법을 넘어 대중매체가 만든 현실을 다시 해체하는 정치적 도구로 자리 잡았다.

파리와 운동의 해체

쾰른에서는 막스 에른스트와 장 아르프가 콜라주와 전시 방식을 실험했고, 하노버의 쿠르트 슈비터스는 거리에서 주운 표, 광고지, 포장지, 나무 조각을 모아 ‘메르츠’라는 독자적인 작업 체계를 만들었다. 파리에서는 1919년 이후 트리스탕 차라가 중심이 돼 선언문, 집회, 공연을 이어갔다. 앙드레 브르통과 루이 아라공을 비롯한 젊은 작가도 합류했지만, 다다의 무조건적인 부정과 조롱만으로는 새로운 작업 체계를 세우기 어렵다는 갈등이 커졌다.

1920년대 초 파리 다다 그룹은 분열했고, 브르통을 중심으로 한 일부 인물이 무의식과 꿈을 탐구하는 초현실주의로 옮겨갔다. 다다는 짧은 기간 안에 조직적인 운동으로서는 흩어졌지만, 예술가가 만든 물건만을 작품으로 보던 기준을 무너뜨렸다. 이후 네오다다, 플럭서스, 상황주의, 펑크 그래픽, 개념미술은 다다가 만든 방법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어받았다.

디자인 특징·시그니처

우연과 조합

다다는 화면을 미리 완벽하게 설계하는 대신, 우연히 만난 재료와 사건을 작업 안으로 끌어들였다. 장 아르프는 찢어진 종잇조각을 떨어뜨린 뒤 그 위치를 바탕으로 콜라주를 만들었고, 다른 작가들은 신문 사진과 광고 문구, 표, 포장지를 잘라 낯선 관계로 다시 붙였다. 이 방식은 작가의 취향과 숙련도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재료가 우연히 만나는 과정까지 작업으로 인정했다.

콜라주와 포토몽타주는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나온 이미지를 한 화면에 밀어 넣는다. 인물의 머리에 기계 부품을 붙이거나 정치인의 얼굴을 광고 이미지와 연결하면서, 매체가 만든 권위와 성 역할을 비틀었다. 매끄러운 원근법 대신 크기가 맞지 않는 사진, 거칠게 잘린 가장자리, 서로 충돌하는 글자가 화면을 채웠다.

레디메이드와 차용

레디메이드는 기존 물건을 새로 만들지 않고 선택해 작품으로 제시하는 방식이다. 물건의 형태를 바꾸는 일보다 누가, 어디에서, 어떤 이름으로 보여주느냐가 중요해졌다. 뒤샹은 이 방법을 통해 기술적 완성도와 작가의 손길만으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던 제도에 질문을 던졌다.

다다 작가들은 대중매체의 사진과 광고, 기계 도면도 원래 목적에서 떼어내 다시 사용했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가져와 뜻을 바꾸는 차용은 이후 팝아트, 광고 비평, 샘플링 문화, 인터넷 밈까지 이어졌다. 새 이미지를 처음부터 만드는 일보다 기존 이미지가 쓰이던 맥락을 바꾸는 일이 디자인의 핵심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글자를 이미지로 다루는 편집

다다의 출판물은 문장을 차례대로 읽게 만드는 일반적인 편집 규칙을 거부했다. 활자 크기와 서체, 방향을 한 페이지 안에서 갑자기 바꾸고, 단어를 대각선이나 원형으로 배치했다. 문장 사이에 기호와 숫자, 광고 조각을 끼워 넣어 글자가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형태와 리듬을 만드는 이미지가 되게 했다.

값싼 종이와 거친 인쇄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정교한 책보다 전단, 선언문, 잡지, 포스터처럼 빠르게 만들고 널리 돌릴 수 있는 형식이 다다의 속도와 맞았다. 이 편집 방식은 이후 신타이포그래피, 펑크진, 해체주의 그래픽, 독립출판에 큰 영향을 줬다.

공연과 몸

카바레 볼테르의 다다는 인쇄물만큼 공연을 중요하게 다뤘다. 기하학적 의상과 가면을 입고 움직이거나,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반복하고, 여러 사람이 동시에 서로 다른 문장을 낭독했다. 관객은 조용히 감상하는 사람이 아니라 야유하고 웃고 반응하며 사건을 함께 만드는 참여자가 됐다.

공연에 쓰인 가면, 의상, 무대 장치, 포스터는 회화와 공예, 그래픽, 무대 디자인의 경계를 섞었다. 다다는 한 점의 작품보다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상황 전체를 설계했고, 이 방식은 퍼포먼스 아트와 해프닝, 플럭서스로 이어졌다.

주요 사례

《카바레 볼테르》와 다다 잡지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 1916)》는 취리히 다다의 초기 활동을 기록한 첫 출판물이다. 후고 발이 편집하고 장 아르프가 표지를 맡았으며, 시와 선언, 드로잉을 여러 언어로 실었다. 표지와 본문은 정돈된 문학잡지보다 공연의 소음과 충돌을 종이 위로 옮긴 구성에 가깝다.

트리스탕 차라가 편집한 잡지 《다다》는 이후 취리히와 파리의 인물을 연결했다. 서로 다른 서체와 크기의 활자, 도표처럼 보이는 기계 이미지, 뜻이 끊기는 문장을 한 지면에 배치해 편집 자체를 선언으로 만들었다. 다다의 인쇄물은 운동의 기록이면서, 국제적인 협업망을 만드는 유통 수단이었다.

마르셀 뒤샹의 《샘》

《샘(Fountain, 1917)》은 공장에서 만든 남성용 소변기를 옆으로 돌려 놓고 ‘R. Mutt 1917’이라는 서명을 적은 레디메이드다. 뒤샹은 독립미술가협회 전시에 이 작품을 제출했지만 전시되지 않았다. 원본은 사라졌고, 오늘날 알려진 형태는 사진과 이후 제작된 복제품을 통해 전해진다.

이 작품은 물건의 외형보다 선택과 전시 맥락을 앞세웠다. 일상용품이 미술관에 들어오는 순간 작품이 될 수 있는지, 작가가 직접 만들지 않은 물건에도 저작권과 창작성을 인정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후 개념미술과 설치미술은 이 질문을 더 넓게 확장했다.

한나 회흐의 《부엌칼로 자르기》

《부엌칼로 자르기(Cut with the Kitchen Knife Dada through the Last Weimar Beer-Belly Cultural Epoch of Germany, 1919~1920)》는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의 정치인, 군인, 예술가, 기계 부품, 지도, 활자를 한 화면에 뒤섞은 대형 포토몽타주다. 회흐는 신문과 잡지에서 오린 이미지를 이용해 권력 관계와 성 역할을 잘라내고 다시 조립했다.

작품 안에서 사람의 몸과 기계가 서로 맞물리고, 크기가 다른 얼굴과 글자가 방향을 잃은 채 흩어진다. 당시 대중매체가 만든 근대적 인간상과 남성 중심 정치 질서를 같은 매체의 이미지로 공격했다는 점에서 베를린 다다의 성격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소피 토이버아르프의 《킹 스태그》 마리오네트

소피 토이버아르프는 1918년 카를로 고치의 희곡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킹 스태그(King Stag)》를 위해 마리오네트와 무대 장치를 디자인했다. 나무를 깎아 만든 구, 원통, 원뿔을 연결하고 강한 색을 칠해 사람과 기계를 함께 떠올리게 하는 인형을 완성했다.

이 작업은 다다를 거친 콜라주나 풍자 이미지로만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토이버아르프는 직물과 자수에서 익힌 기하학적 구성을 입체와 움직임으로 확장했고, 공예와 공연, 추상미술을 하나의 작업 안에서 연결했다.

쿠르트 슈비터스의 메르츠

쿠르트 슈비터스는 거리에서 주운 버스표, 광고지, 포장지, 철사, 나무 조각을 붙여 ‘메르츠(Merz)’ 작업을 만들었다. 메르츠라는 말도 콜라주에 들어간 독일어 ‘코메르츠(Kommerz)’의 일부를 잘라 만든 이름이다. 버려진 재료의 원래 쓰임을 지우지 않은 채 색과 글자, 질감으로 다시 배열했다.

슈비터스는 이 방식을 평면에서 공간으로 넓혀 하노버의 집 안에 《메르츠바우(Merzbau)》를 만들었다. 방과 기둥, 작은 공간을 계속 덧붙여 집 전체를 자라는 콜라주처럼 바꿨다. 원작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파괴됐지만, 설치와 공간 디자인을 작품으로 다루는 방식에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반응과 평가

위상과 영향

다다는 하나의 시각 양식을 남기기보다 작품을 만드는 규칙을 바꿨다. 레디메이드는 개념미술과 팝아트, 포토몽타주는 정치 포스터와 잡지 편집, 우연과 공연은 초현실주의와 플럭서스, 해프닝으로 이어졌다. 작가가 직접 만든 고유한 물건보다 선택, 지시, 맥락, 복제, 참여가 중요할 수 있다는 관점도 다다를 거치며 널리 퍼졌다.

그래픽 디자인에서는 비대칭 편집, 서체 혼용, 사진과 활자의 충돌, 잘린 이미지의 거친 가장자리가 오래 남았다. 1970년대 펑크진과 음반 표지, 1990년대 해체주의 그래픽, 디지털 콜라주와 인터넷 밈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졌지만 다다가 만든 조합과 차용의 방식을 반복해 사용했다.

디자인 반응

다다의 화면은 질서가 없고 조잡해 보일 수 있다. 한쪽에서는 이 거친 구성이 전쟁과 대중매체가 만든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내며, 누구나 주변 재료로 작업할 수 있도록 예술의 문턱을 낮췄다고 본다. 다른 쪽에서는 우연과 충격을 앞세운 방식이 형태를 오래 다듬는 디자인의 책임을 피하고, 관객에게 의미 해석을 떠넘긴다고 본다.

레디메이드도 같은 이유로 평가가 갈린다. 물건을 새로 만들지 않고 선택만으로 작품을 성립시킨 점은 창작의 범위를 넓혔다. 반면 작가와 미술관의 권위가 평범한 물건을 작품으로 바꾼다는 점에서, 다다가 공격한 제도적 권력을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따른다.

비판

다다는 기존 질서를 거부했지만 운동 내부의 권력 관계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한나 회흐와 소피 토이버아르프를 비롯한 여성 작가는 출판, 공연, 공예, 콜라주에서 중요한 작업을 맡았지만 오랫동안 남성 작가 중심의 역사 뒤로 밀렸다. 다다가 공예와 무대 작업을 미술의 경계 안으로 끌어들였음에도, 같은 분야에서 활동한 여성의 기여는 늦게 재평가됐다.

취리히 다다의 가면과 공연에는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문화에서 가져온 형식이 섞였다. 유럽의 전쟁과 합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비유럽 문화를 자유와 원초성의 상징으로 사용했지만, 실제 문화의 맥락을 지우고 이국적인 이미지로 소비했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다다의 반예술 전략은 반복될수록 제도 안에서 익숙한 전위 양식으로 굳었다. 충격을 주기 위해 만든 레디메이드와 거친 콜라주가 미술관의 대표 소장품과 디자인 교육의 정전이 되면서, 제도를 무너뜨리려던 행동이 새로운 제도의 언어가 되는 역설을 남겼다.